담양 국씨(潭陽 鞠氏) — 전남 담양을 본관으로 하며, 송나라에서 고려로 귀화한 국주를 시조로 하는 국씨입니다.
전남 담양을 본관으로 하며, 송나라에서 고려로 귀화한 국주를 시조로 하는 국씨입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담양 국씨 인구는 약 19,089명으로 집계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씨·본관 가운데 하나입니다. 같은 국씨라도 본관(담양)이 다르면 계통이 다른 집안입니다. 본관·파·항렬의 뜻이 궁금하다면 본관·파·항렬 정리 가이드를 참고하세요.
뚜렷한 파 구분은 이번에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파(계파) 구분은 문중·족보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우리 집안 파는 족보에서 확인하세요.
국주(시조), 국유(두문동 충절), 국경례(사간·세조 직간), 국채표(기상학자), 국쾌남(대한극장 설립자·민의원)
이름을 누르면 인물 상세(생몰·약력·묘소·후손)를 볼 수 있습니다.
담양 국씨(潭陽 鞠氏)의 시조는 국주(鞠周)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송나라 휘종 원년(1101년) 중국 절강성 항주에서 태어난 공경대부였고, 금나라가 송 흠종을 납치한 정란(1127년) 뒤 원병을 청하려고 1128년 고려에 들어와 귀화했다고 합니다. 고려 인종 때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군신 관계를 강요하는 금의 요구에 맞서 외교적 평등 관계를 맺고 돌아왔고, 그 공으로 삼중대광 추성군에 봉해졌으며 인종이 담양을 본관으로 정해 주었다고 전합니다. 연대와 행적은 단일 자료에 의존하므로 족보로 확인하세요.
담양은 백제 때 추자혜군, 신라 경덕왕 때 추성군이었고 고려 현종 때 담양군으로 개편되었으며, 조선 태종 때 담양도호부가 되었다가 1914년 창평군이 담양군에 병합되었습니다.
시조 이후 국지원·국영돈·국호 등이 고위 관직을 지낸 것으로 기록된다고 합니다. 고려 말 호부상서 국유는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갔고, 태조 이성계가 그 충절을 기려 자손을 담양 관리로 임명했다고 전합니다. 조선 초 국경례는 1451년 문과에 급제해 사간원 사간을 지냈고 세조의 난정을 직간했으며, 이후 대사간 임명에도 응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그의 여섯 아들(거경·화경·승경·장경·방경·치경) 대에 가문이 크게 번성했다고 기록됩니다.
국항규는 1854년 관방제림 재축조 때 사재로 괴목 수천 그루를 심었다고 전하며, 국동욱은 임오군란 때 군자금을 헌납해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고 합니다. 의병장 국동완은 1909년 체포되어 사형당했고 1991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고 위키백과가 전하나, 이번에 다른 자료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현대에는 기상학자 국채표(제2대 중앙관상대장), 대한극장을 세운 국쾌남(제4대 민의원)이 있고, 국종남·국창근이 국회의원, 국양문이 낙죽장 기능보유자로 소개됩니다.
1985년 14,872명, 2000년 15,774명, 2015년 19,089명, 2024년 23,013명으로 위키백과가 소개합니다.
국씨의 시조 전설(국도 등)은 전승에 기반한 서술이니 사실로 단정하지 마세요.
담양 국씨 종친회 홈페이지는 한국전자족보도서관 종친회 목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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