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산 연씨(谷山 延氏) — 황해도 곡산을 본관으로 하며, 조선 개국·좌명공신 연사종(延嗣宗)을 실질적 시조로 삼는 희성(稀姓)입니다.
황해도 곡산을 본관으로 하며, 조선 개국·좌명공신 연사종(延嗣宗)을 실질적 시조로 삼는 희성(稀姓)입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곡산 연씨 인구는 약 34,766명으로 집계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씨·본관 가운데 하나입니다. 같은 연씨라도 본관(곡산)이 다르면 계통이 다른 집안입니다. 본관·파·항렬의 뜻이 궁금하다면 본관·파·항렬 정리 가이드를 참고하세요.
곡산 연씨는 대(代)가 내려오며 여러 계파(파)로 나뉘었습니다. 우리 집안이 어느 파에 속하는지는 보유하신 족보나 문중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파와 항렬의 개념은 본관·파·항렬 가이드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연사종(곡산 연씨 시조·조선 개국·좌명공신), 연최적(숙종조 문신·의민공)
이름을 누르면 인물 상세(생몰·약력·묘소·후손)를 볼 수 있습니다.
곡산 연씨(谷山 延氏)는 황해도 곡산(谷山)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기준 약 34,766명의 희성(稀姓)입니다. 문중에서 실질적인 시조로 받드는 인물은 조선 초의 무신 연사종(延嗣宗) 장군입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본래 곡산에 살던 그의 집안은 조부 대에 함경도 함흥(咸興)으로 옮겨 살았고, 연사종도 함흥에서 태어났습니다.
연사종은 태조 이성계와 동향(同鄕)으로 위화도 회군에 공을 세워 개국원종공신에 오르고, 제2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으며 곡성군(谷城君)에 봉해졌습니다. 오늘날 황해도 이남의 곡산 연씨는 사실상 모두 그에게 뿌리를 두고 있어, 문중은 그를 실질적인 시조로 삼습니다.
선대가 좌명공신이었던 덕분에 곡산 연씨 후손들은 조선 전기 내내 보은(報恩) 인사로 발탁되거나 웬만한 죄는 면책을 받는 등 여러 은전(恩典)을 입었습니다. 맏아들 연경(延慶)은 판안주목사를 지내고 1450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 베이징에 다녀왔으며, 이후로도 당상관에 오르는 후손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명종 2년(1547) 정미사화(丁未士禍)에 일족이 연루되어 연애·연백재·연의 등이 화를 입으면서, 문중 일부는 한성을 떠나 청안(淸安)과 영남 지방으로 낙향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한동안 문과 급제자가 끊겼다가, 광해군 13년(1621) 연섭(延爕)이 다시 문과에 오르며 가문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숙종 대의 문신 치당(癡堂) 연최적(延最績)은 1682년 문과에 급제해 도승지 등을 지냈으나, 인현왕후 폐위의 부당함과 이에 연루되어 화를 입은 이들의 용서를 간하는 상소를 올리다 형장에서 옥사하였습니다. 뒷날 영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정조 8년 '의민(毅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절의의 가풍은 곡산 연씨가 수는 적어도 조선사에 이름을 남긴 배경으로 꼽힙니다.
계파·세계(世系)의 자세한 갈래는 문중·족보에 따라 차이가 있으니, 우리 집안 내력은 보유하신 족보에서 확인하세요. (참고: 나무위키 「연(성씨)」·「연사종」, 조선왕조실록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