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군량 조달과 구휼에 힘쓴 이조판서 (호 명곡, 시호 충간)
| 생몰 | 1539 ~ 1594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한산 이씨 |
이산보(李山甫, 1539~1594)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 자는 중거(仲擧), 호는 명곡(鳴谷), 시호는 충간(忠簡)입니다. 목은 이색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이지무, 어머니는 김제군수 구승유의 딸입니다. 작은아버지 토정 이지함에게 배웠고 영의정 이산해와는 사촌 사이입니다. 보령 출신이며 사람됨이 소박하고 정직해 이해득실에 흔들리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1568년(선조 1) 증광 문과에 급제해 해미현감, 정언, 전적을 거쳐 순안어사로 북도를 순찰하고 돌아왔고, 홍문관 요직을 지냈습니다. 동인의 탄핵으로 종부시정으로 좌천되었다가 동부승지와 대사간을 지냈고, 1585년 부제학 김우옹이 이이·정철을 논박한 일을 반박해 선조의 신임을 얻어 대사헌에 올랐습니다.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 뒤의 기축옥사에서는 대사간으로 난국을 수습했습니다. 1591년 건저 문제로 정철 등 서인이 화를 입을 때 황해도관찰사로 있다가 연루되어 파직되고 고향 보령으로 돌아가 독서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했고 이조참판과 이조판서를 지냈습니다. 명나라 군대가 요양에 머물며 진군하지 않자 이여송을 설득해 명군이 조선으로 들어오게 하는 데 공이 컸고,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북도와 삼남의 도검찰사로 나갔는데 지난날 선정에 감복한 백성들이 협조해 무사히 해결했다고 합니다. 1594년 대기근이 들자 동궁의 명을 받아 밤낮으로 구휼에 힘쓰다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1604년 호종공신 2등에 책록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한흥부원군에 추봉되었습니다. 보령의 화암서원과 서천의 건암서원에 제향되었습니다.
이산보는 당쟁이 치열하던 시기에 소박하고 정직한 성품으로 평가받은 인물입니다. 사촌 이산해와 달리 정치적 영수로 나서기보다 현장에서 군량과 구휼을 챙기는 실무형 관료였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묘역이 있는 보령 일대와 서천은 이지함·이산해·이산보 등 한산 이씨 인물의 연고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은아버지 이지함에게서 배웠고, 사촌 이산해와는 조정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이여송을 설득해 명군이 조선으로 들어오게 하는 데 공을 세웠고, 도검찰사로 북도와 삼남의 군량을 조달했습니다.
1594년 대기근 때 동궁의 명으로 구휼에 나섰다가 과로로 병을 얻어 별세했고, 훗날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고만산에 묘역이 있다고 전합니다.
아버지는 이지무이며 이지함의 조카입니다. 사촌 형은 이산해입니다.
임진왜란 때 이조판서로 군량 조달과 구휼에 힘쓴 문신으로 호는 명곡입니다.
사촌 사이입니다.
1594년 대기근 구휼에 힘쓰다 병을 얻어 별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