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동 진씨 족보·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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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동 진씨(廣東 陳氏) — 정유재란 때 이순신과 함께 노량해전을 치른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璘)을 시조로 하는 본관입니다. 명나라가 망한 뒤 조선으로 건너온 손자 진영소의 후손이 전남 해남 산이면 황조마을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인구 — 약 2,397명 (2015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기준)

광동 진씨란

정유재란 때 이순신과 함께 노량해전을 치른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璘)을 시조로 하는 본관입니다. 명나라가 망한 뒤 조선으로 건너온 손자 진영소의 후손이 전남 해남 산이면 황조마을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광동 진씨 인구는 약 2,397명으로 집계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씨·본관 가운데 하나입니다. 같은 진씨라도 본관(광동)이 다르면 계통이 다른 집안입니다. 본관·파·항렬의 뜻이 궁금하다면 본관·파·항렬 정리 가이드를 참고하세요.

광동 진씨의 뿌리와 역사

본관과 시조

광동 진씨(廣東 陳氏)는 중국 광둥성(廣東省)을 본관으로 하는 귀화 성씨입니다. 시조는 임진왜란의 마지막 단계인 정유재란 때 명나라 수군을 이끌고 조선에 와서 이순신과 함께 노량해전을 치른 진린(陳璘, 1543~1607)입니다. 다만 진린 자신은 전쟁이 끝난 뒤 명나라로 돌아갔고, 조선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명나라가 망한 뒤 바다를 건너온 그의 손자 진영소(陳泳素)입니다. 그래서 문중은 진린을 시조로, 진영소를 조선 입향조로 받듭니다. 본관 '광동'은 진린의 고향인 광둥성 소주부(韶州府) 옹원현(翁源縣), 지금의 사오관시 웡위안현을 가리킵니다.

우리나라의 진(陳)씨 가운데 수가 가장 많은 여양 진씨와는 계통이 전혀 다른 별개의 본관입니다.

시조 진린

《명사(明史)》 열전에 따르면 진린은 자가 조작(朝爵)이고 광둥 옹원 사람입니다. 1560년대부터 광둥 일대의 반란과 해적을 진압하며 벼슬이 올랐고, 나방(羅旁) 토벌 뒤에는 그 땅에 새로 둔 둥안현(東安縣)의 참장 일을 맡았습니다. 뛰어난 지략으로 이름났지만 가는 곳마다 재물을 탐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아 파직과 복직을 거듭했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광둥 병사 5천 명을 이끌고 조선 구원에 나섰고, 이듬해 어왜총병관(禦倭總兵官)으로서 명나라 수군 전체를 지휘했습니다. 1598년 음력 7월 전라도 고금도(지금의 완도군 고금면)에 이르러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연합 함대를 이루었고, 그해 음력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일본 함대를 크게 무찔렀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순신과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鄧子龍)이 전사했습니다. 명나라 조정은 이 전쟁의 공을 따지며 진린을 으뜸으로 꼽았습니다.

진린은 1599년 귀국한 뒤 양응룡의 난(播州之役)과 구이저우 묘족 봉기를 진압했고, 광둥 진수로 옮겼다가 1607년 재직 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은 뒤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추증되었습니다. 한국 측 자료와 문중에서는 그가 광동백(廣東伯)에 봉해졌다고 전하지만, 이 작위는 《명사》 열전에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손자 진영소, 조선으로 건너오다

문중 전승과 향토 자료에 따르면, 1644년 명나라가 청나라에 망하자 진린의 손자 진영소가 할아버지의 뜻을 좇아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진린의 수군 본영이 있었고 진린이 세운 관왕묘가 있던 고금도에 머물렀다가, 해남 해리(海里, 지금의 해남읍 일대)로 옮겨 살았다고 전합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그가 명나라에서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를 지냈고 남경에서 배를 타고 와 남해안 장승포에 닿았다가 고금도로 옮겼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후 진영소의 아들 대에 지금의 해남군 산이면 덕송리로 들어가, 명나라 유민이라는 뜻을 담아 마을 이름을 황조(皇朝)라 했다고 합니다. 다만 자료마다 세부가 다릅니다. 디지털해남문화대전의 황조별묘 항목은 황조마을을 연 사람을 진석문(陳碩文)이라 하지만, 같은 사전의 덕송리 항목은 진영소의 아들 진석권(陳碩權)과 진윤권(陳允權)이 해남으로 옮겼다고 적고 있습니다. 2014년 경향신문 보도에 실린 문중의 설명에서는 바다를 건너온 손자의 이름이 조(詔)로 나오고, 그가 망명한 지 16년 만에 열네 살 아들 석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며, 고아가 된 석문이 떠돌다 30대 초반에 황조마을에 터를 잡았다고 합니다.

황조마을과 황조별묘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덕송리의 황조마을은 오늘날까지 광동 진씨의 대표적인 집성촌입니다. 2014년 보도에 따르면 마을 72가구 가운데 60가구, 82명이 광동 진씨였고, 1990년대에는 100가구가 넘었다고 합니다. 마을 집 대부분이 떠나온 중국 쪽인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마을 뒷동산 중턱의 황조별묘(皇朝別廟)에는 진린과 아들 진구경(陳九經), 손자 진영소, 증손 진석문의 위패를 모십니다. 1679년(숙종 5) 무렵 단을 쌓아 진린을 제사하다가 1871년(고종 8)에 사당을 세웠으며, 지금 걸린 진린의 영정은 1997년 중국 웡위안현 정부가 그려 와 바친 것입니다. 해남군 향토문화유적 제10호(2003년 지정)이며, 문중은 해마다 이곳에서 큰 제사를 올립니다.

고금도 관왕묘

진린은 1598년 고금도에 관우(關羽)를 모시는 관왕묘(關王廟)를 세웠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처음에는 관우와 바다의 신 마조(媽祖)를 함께 모셨고, 1666년에는 동무(東廡)에 진린과 이순신을 함께 모셨습니다. 1791년(정조 15)에는 '탄보묘(誕報廟)'라는 사액을 받으면서 노량에서 전사한 등자룡도 모시게 되어, 동무에 진린·등자룡, 서무에 이순신을 모시는 구조가 되었습니다. 이 관왕묘는 일제강점기에 헐렸고, 광복 뒤 이순신 유적으로 정비되어 사적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이 되었으며, 지금 충무사 정전에는 이순신과 이영남을 모십니다.

인구와 세거지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광동 진씨는 2000년 1,222명, 2015년 2,397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해남 산이면 황조마을이 중심 세거지이며, 해남군 황산면 한자리에도 조선 말엽 광동 진씨가 들어와 살았다는 지명 유래가 전합니다. 문중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에는 감시를 피하려고, 광복 뒤에는 다른 이유로 본관을 다른 진씨로 바꾼 사람이 많아서 실제 후손은 통계보다 많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종친회와 족보

광동 진씨는 1999년 처음으로 종친회를 세웠고, 2005년 문중 족보를 펴냈습니다. 이 족보는 베이징대·난징대·대만국립대 등 중화권 대학 도서관에도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2022년 신화통신 보도에 따르면 한국 진씨 종친회는 중국 쪽 후손과 함께 족보를 엮었고, 코로나19 유행 때에는 마스크 3만여 장을 마련해 윈푸시로 보냈습니다.

중국과의 교류

황조마을의 존재는 1990년대 초 중국 학자 상위허(尚玉河)의 조사로 중국에 알려졌습니다. 1994년 황조리의 광동 진씨 13명이 웡위안현의 초청으로 진린의 고향을 찾은 것을 시작으로 교류가 이어졌고, 1999년 10월 해남군과 웡위안현이 자매결연을 맺었습니다. 웡위안현은 해남군의 유일한 해외 자매결연 지역입니다. 진린이 참장으로 있었던 둥안, 곧 지금의 윈푸시 윈안구에도 3천여 명의 진린 후손이 살고 있으며, 2004년부터 이곳과의 교류도 이어졌습니다. 해남군과 윈안구는 2024년 우호교류 협약을 맺었습니다.

2014년 7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명나라 장군 진린의 후손이 오늘까지 한국에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도 베이징대 연설에서 한국에 진린 장군의 후손 2천여 명이 살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황조별묘는 역대 주한 중국대사들이 해남을 찾는 이유로 꼽히기도 합니다.

진린을 보는 엇갈린 시선

진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립니다. 《징비록》과 《선조실록》 등 조선 측 기록에는 그가 거만하고 사나웠으며, 조선 수군의 전공을 가로채고 출전에 소극적이어서 이순신과 갈등을 빚었다는 내용이 남아 있습니다. 반면 이순신의 정성에 감복해 그를 존경하게 되었고 그의 죽음에 통곡했다는 이야기도 널리 전합니다. 광동 진씨 후손들은 진린이 탐욕스럽고 소극적인 인물로만 그려지는 데 아쉬움을 표해 왔습니다. 진린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2004~2005)과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2023) 등에도 나옵니다.

출처: 《명사》 권247, 디지털해남문화대전(황조별묘·덕송리·세거 성씨·자매결연도시), 유성웅·장경희 〈고금도 관왕묘 연구〉(2015), 경향신문(2014.9.19), 신화통신(2022.7.9), 위키백과 등. 입향 경위와 인물 이름은 자료마다 차이가 있어 '전한다'로 표기했습니다.

주요 파(派)

해남 황조 문중

해남 황조 문중 (海南 皇朝 門中)

광동 진씨는 따로 파가 나뉘었다는 기록이 확인되지 않으며, 사실상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덕송리 황조마을에 정착한 진린의 손자 진영소의 후손이 문중의 전부입니다. 2014년 보도 당시 문중 사람들은 진린을 1세로 하여 15·16세손이 함께 마을에 살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진영소는 명나라가 망한 1644년 이후 고금도를 거쳐 해남 해리로 옮겨 살았고, 아들 대에 지금의 황조마을로 들어와 명나라 유민이라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황조(皇朝)라 했다고 합니다. 마을을 연 사람은 자료에 따라 진석문(陳碩文)으로도, 진석권(陳碩權)·진윤권(陳允權) 형제로도 나옵니다. 마을 뒷동산의 황조별묘(1871년 건립, 해남군 향토문화유적 제10호)에는 진린·진구경·진영소·진석문의 위패를 모십니다.

마을은 쌀과 배추 농사를 주로 하며, 1980년대 말부터 마을 주변에 큰 간척지가 생기면서 농토가 크게 늘었다고 합니다. 문중은 1999년 종친회를 만들고 2005년 족보를 펴냈습니다. 1994년부터는 진린의 고향인 중국 광둥성 웡위안현의 진씨 문중과 오가며 제사와 교류를 이어 오고 있습니다.

파(계파) 구분은 문중·족보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우리 집안 파는 족보에서 확인하세요.

대표 인물

진린(시조·명나라 수군 제독·노량해전), 진영소(진린의 손자·조선 입향조)

이름을 누르면 인물 상세(생몰·약력·묘소·후손)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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