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국채보상운동의 발의자, 상인·독립협회 회원, 천주교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 생몰 | 1850 ~ 1913 |
| 시대 | 개항기·대한제국기 |
| 본관 | 대구 서씨 |
서상돈(1850~1913)은 조선 및 대한제국의 민족운동가이자 기업인으로, 위키백과 대구 서씨 문서에 대구 서씨 인물로 올라 있습니다(본관을 달성 도위공파로 적는 보도도 있고, 출생년을 1851년으로 적는 자료도 있어 족보로 확인하세요). 대구에서 지물 행상과 포목상으로 성공한 거상이었고 정부의 검세관이 되어 조세곡을 관리하기도 했습니다. 천주교 신자로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입니다.
병인박해 때 대구감영 옥에 갇힌 삼촌 서인순을 찾아간 일을 계기로, 부유해진 뒤에도 평생 쌀밥을 먹지 않고 봄가을로 곡식 창고를 열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었다고 전합니다.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했고 만민공동회에서도 재무 일을 맡았습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대동광문회로 개칭하는 특별회)에서 2천만 국민이 석 달간 담배를 끊고 20전씩 모으면 1,300만 원의 국채를 갚을 수 있다고 제안하고 자신이 먼저 800원을 내어 그날 2,000원을 모았습니다. 사장 김광제와 함께 취지서를 만들었고, 이 운동은 2월 대한매일신보 보도를 계기로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이후 경북국채보상도총회 총무장을 맡았습니다. 일제는 신문지법·보안법 등으로 이 운동을 탄압했습니다.
지물 행상과 포목상으로 성공해 거상이 되었고, 병인박해 때 옥에 갇힌 삼촌을 만난 경험으로 평생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고 전합니다.
1907년 대구 광문사에서 단연으로 국채 1,300만 원을 갚자고 발의했고, 이 소식이 서울과 전국, 해외로 퍼졌습니다. 같은 해 2월 대구 여성들이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결성하기도 했습니다.
묘소의 위치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후손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루지 않습니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상인 출신 민족운동가입니다.
국민이 석 달간 담배를 끊고 모은 돈으로 일본에 진 국채를 갚자는 단연 운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