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오씨(羅州 吳氏) — 전라남도 나주시를 본관으로 하며, 나주의 옛 이름을 따 금성 오씨(錦城 吳氏)라고도 불리는 성씨입니다. 고려 중랑장 오언(吳偃)을 기세조로 하고, 태조 왕건의 제2비 장화왕후를 배출한 나주 호족 오다련의 가문과 연결되어 전해집니다.
전라남도 나주시를 본관으로 하며, 나주의 옛 이름을 따 금성 오씨(錦城 吳氏)라고도 불리는 성씨입니다. 고려 중랑장 오언(吳偃)을 기세조로 하고, 태조 왕건의 제2비 장화왕후를 배출한 나주 호족 오다련의 가문과 연결되어 전해집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나주 오씨 인구는 약 32,610명으로 집계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씨·본관 가운데 하나입니다. 같은 오씨라도 본관(나주)이 다르면 계통이 다른 집안입니다. 본관·파·항렬의 뜻이 궁금하다면 본관·파·항렬 정리 가이드를 참고하세요.
송은당공파, 금양군파, 도암공파, 명곡공파, 석문공파, 도림공파
송은당공파는 오탁진(吳琢珍, 호 송은)을 파조로 합니다. 오탁진은 사마양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정당문학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한 것으로 전합니다.
금양군파는 오겸(吳謙, 1496~1582)을 파조로 합니다. 오겸은 오자치의 손자로 1532년 별시에 급제해 전라도관찰사, 호조참판, 예조판서,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찬성에 올랐으며 금양군에 봉해졌습니다. 아래로 남평공파·파성공파가 갈라졌다고 정리되기도 합니다.
도암공파는 오희길(吳希吉, 1556~1625, 호 도암)을 파조로 합니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겨 보존하는 데 공을 세웠고 벼슬은 현감에 이르렀으며, 고창 월계정사에 제향되었다고 전합니다.
명곡공파는 오희도(吳希道, 1583~1623)를 파조로 합니다. 1623년(인조 원년) 알성시에 급제해 검열에 이르렀으나 같은 해 두창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아들들이 석문공파·도림공파 등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석문공파는 오희도의 3남 오이익(吳以翼, 1618~1666)을 파조로 합니다. 1652년 증광시에 급제해 병조좌랑 겸 지제교를 지냈고, 함평현감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으나 무고로 유배된 뒤 벼슬을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도림공파는 오이구를 파조로 하며 장탄파(長灘派)라고도 불립니다. 그의 아들 오효석(호 생로당)은 명나라 멸망 후 나주에 은거하며 송시열과 교유한 것으로 전합니다.
파(계파) 구분은 문중·족보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우리 집안 파는 족보에서 확인하세요.
장화왕후(고려 태조 비), 오다련(나주 호족), 오자치(적개공신), 오겸(좌찬성), 오희길(실록 보존), 오희도(문신)
이름을 누르면 인물 상세(생몰·약력·묘소·후손)를 볼 수 있습니다.
나주 오씨(羅州 吳氏)는 전라남도 나주시를 본관으로 하며, 나주의 옛 이름 금성(錦城)을 따 금성 오씨(錦城 吳氏)라고도 합니다. 족보상 기세조(起世祖)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오언(吳偃)이며, 그 윗대로 고려 중엽 진사를 지냈다는 오숙규(吳淑珪)를 관조(원시조)로 모시되 이후 몇 대는 실전되어 세계가 이어지지 않는 것으로 전합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 서기 500년 무렵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오첨(吳詹)을 도시조로 모시는 전승도 있으나, 이는 족보 전승에 의존하는 이야기입니다.
금성 오씨라는 이름은 조선 초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오자치가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진 일과도 연결 지어 설명되곤 합니다. 다만 나주는 고려 이래 '금성'으로도 불렸고, 대종회는 본관을 '금성'에서 '나주'로 바로잡아 쓰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오씨(吳氏)는 중국 춘추시대 오(吳)나라의 후손이라는 전승을 공유하는 성씨로, 우리나라에서는 해주·나주·동복·보성·함양 등 여러 본관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가장 큰 계열은 해주 오씨이며, 나주 오씨는 그와 별개의 본관으로 전해집니다. 다만 해주 오씨 향파의 시조로 모시는 오현보(吳賢輔)를 나주 오씨 관조 오숙규의 부친으로 보는 주석이 있고, 오첨을 도시조로 삼는 전승도 겹치는 등 일부 족보에서는 두 계통의 연결을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은 자료에 따라 다르므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같은 오씨의 다른 본관으로 동복 오씨, 보성 오씨, 함양 오씨도 있습니다.
통계청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나주 오씨는 18,152명, 금성 오씨는 14,458명으로 두 표기를 합하면 32,610명입니다. 이전 조사에서는 1985년 약 26,245명(6,003가구), 2000년 약 25,546명(7,916가구)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세거지는 광주광역시(광산구·서구)와 전남 나주·담양·무안·영광·장성·신안, 전북 고창·김제·정읍·부안, 울산 울주, 부산 기장, 경북 구미, 경남 양산 등으로 전해집니다.
나주 오씨의 이름이 가장 먼저 크게 나오는 것은 후삼국 시기입니다. 나주 일대의 호족 오다련(吳多憐, 856~944로 전함)의 딸이 고려 태조 왕건의 제2비 장화왕후(莊和王后)로, 고려 제2대 왕 혜종을 낳았다고 합니다. 나주 완사천에서 왕건에게 버들잎을 띄운 물을 건넸다는 설화가 유명하나, 설화적 성격이 강해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이후 오탁진(호 송은)은 진사에 합격하고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한 것으로 전하며,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대제학에 오른 오중달(호 남강)은 조선 건국 후 물러났다고 합니다.
조선 초에는 오자치가 1467년(세조 13)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에 책록되고 나성군에 봉해졌으며, 1476년(성종 7)에 그려진 공신도상 초상은 보물 제119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의 손자 오겸은 금양군에 봉해지고 좌찬성에 올랐으며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사후 우의정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오희길이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겨 보존하는 데 공을 세웠고, 오득린(호 구암)은 이순신 휘하에서 옥포·당포·노량 해전에 참전했다고 전합니다. 인조 대 이후로는 오희도의 아들들과 후손이 학문과 관직으로 이름을 이었고, 오이규(호 지천)는 영국공신 1등에 녹훈되었습니다. 오효석은 명나라 멸망 후 나주에 은거하며 송시열과 교유했고, 구한말 오계수는 기정진의 제자로 을미사변 뒤 의병 활동에 가담했습니다.
나주 오씨의 파는 대체로 송은당공파·금양군파·도암공파·명곡공파·석문공파·도림공파 등 파조가 알려진 파와, 사정공파·칠송공파·공조참판공파·공조참의공파·참봉공백양동파·지봉공파·난봉공파·상호군공파·정언공파·내금위공파 등 파조 정보가 확인되지 않는 파로 나뉩니다. 부사공파 아래에 백은공파·송은공파·죽은공파가, 금양군파 아래에 남평공파·파성공파가 갈라졌다는 정리도 있습니다. 세부 계통은 자료마다 차이가 있어 본인의 족보에서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려의 장화왕후, 조선의 오자치·오겸·오희길·오희도, 근현대의 독립운동가 오상렬·오성술, 대법관 오필선, 국회의원 오영식, 양궁 지도자 오교문, 아나운서 오상진 등이 나주 오씨로 소개됩니다. 장화왕후와 오다련은 장화왕후·오다련 항목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자치 공신도상 초상(보물 제1190호), 오득린이 나주에 정착하며 심었다고 전하는 호랑가시나무(천연기념물 제516호, 2009년 지정), 오희길을 제향한 고창 월계정사 등이 나주 오씨와 관련된 유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주오씨대종회가 있으며 본관 표기를 '나주'로 통일할 것을 권장합니다. 항렬은 파에 따라 다르며, 대체로 13세 시(時), 14세 원(源), 15세 상(相), 16세 환(煥), 17세 규(圭)·재(在), 18세 선(善), 19세 수(洙), 20세 근(根), 21세 열(烈)·섭(燮), 22세 교(敎)·균(均), 23세 종(鍾)·진(鎭), 24세 영(泳), 25세 병(秉), 26세 희(熙), 27세 재(載), 28세 호(鎬), 29세 순(淳), 30세 식(植) 순으로 전해집니다. 정확한 세대 수와 항렬자는 소속 파의 족보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나주 오씨 종친회 홈페이지는 한국전자족보도서관 종친회 목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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