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주씨(新安 朱氏) — 신안 주씨(新安 朱氏)는 남송의 주희(朱熹)를 먼 시조로 모시고, 고려 때 바다를 건너온 그의 증손 주잠(朱潛)을 동국 시조로 모시는 성씨입니다. 오랫동안 능성 주씨로 불리다가 1902년 관향을 신안으로 회복했습니다. 2015년 인구는 148,207명입니다.

신안 주씨(新安 朱氏)는 남송의 주희(朱熹)를 먼 시조로 모시고, 고려 때 바다를 건너온 그의 증손 주잠(朱潛)을 동국 시조로 모시는 성씨입니다. 오랫동안 능성 주씨로 불리다가 1902년 관향을 신안으로 회복했습니다. 2015년 인구는 148,207명입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신안 주씨 인구는 약 148,207명으로 집계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씨·본관 가운데 하나입니다. 같은 주씨라도 본관(신안)이 다르면 계통이 다른 집안입니다. 본관·파·항렬의 뜻이 궁금하다면 본관·파·항렬 정리 가이드를 참고하세요.
신안 주씨(新安 朱氏)는 2015년 인구조사에서 148,207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붉을 주(朱) 자를 쓰는 주씨는 오늘날 거의 모두 신안을 본관으로 씁니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의 주희(朱熹)를 먼 시조로 모시며, 고려 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그의 증손 주잠(朱潛)을 동국 시조로 삼습니다. 상주 주씨처럼 두루 주(周) 자를 쓰는 주씨는 신안 주씨와 다른 성씨입니다(상주 주씨).
자료에 따라 주희를 시조로 적기도 하고(위키백과, 디지털성주·부여·여수문화대전) 주잠을 시조로 적기도 합니다(창원·김해·진도 지역 자료). 위키백과는 시조를 주희, 중시조를 주잠으로 적습니다.
본관 신안은 우리나라 땅이 아닙니다. 중국 안휘성 휘주부 일대, 지금의 황산시 근처에 있던 옛 신안군(新安郡)입니다. 수나라 때 처음 신안군이 설치되었고 뒤에 휘주(徽州)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주희 집안의 본래 고향인 무원(婺源)이 이 휘주에 속했기 때문에, 주희의 후손을 자처하는 주씨가 이곳을 관향으로 삼았습니다. 일부 자료(신아일보, 디지털여수문화대전)는 신안의 위치를 '하남성'으로 적습니다.
『고종실록』 고종 39년(1902) 기사에 실린 주석면의 상소에 따르면, 주희의 8대조 주괴(朱瓌)가 당나라 천우 연간에 흡주 황돈에서 휘주 무원으로 옮겨 살았습니다. 선조가 오군 신안 사람이었으므로 신안을 관향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같은 상소는 주잠을 주희의 둘째 아들 주야(朱埜)의 손자이자 주거(朱鉅)의 셋째 아들로 적고 있습니다.
족보 전승에 따르면 주잠은 송에서 한림학사·비서각 직학사를 지냈습니다. 몽골의 침입을 피해 아들 주여경(朱餘慶), 그리고 섭공제·조창·진조순·주세현·유응규·두행수·도성하 등 문인 7학사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나주(금성)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이후 화순 능성(지금의 능주)에 숨어 살았으며, 원나라의 수색을 피하려고 이름을 주적덕(朱積德)으로 바꿨다고 전합니다.
다만 망명 시기와 경위는 족보 전승에 기댄 부분이 많아 자료마다 다릅니다. 고종실록 상소는 '고려 강종 원년 임신년(1212)'으로 적었고, 디지털시흥·김해문화대전과 남도일보는 1224년(고종 11)으로 적었습니다. 은거지도 신아일보는 진안 용담, 남도일보는 진안 주천면 신안촌으로 서로 다르게 적습니다.
이 집안은 처음에 정착지인 능성을 따라 능성 주씨라 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수를 디지털시흥문화대전과 신아일보는 45개 파로, 위키백과와 디지털여수문화대전은 87개 본관으로 적습니다. 1902년 주석면이 상소를 올리자 고종이 "관향을 다시 신안으로 회복하라"고 비답했고, 종중이 이에 합의해 신안으로 복관했습니다. 상소 날짜는 실록에 양력 10월 8일로 실려 있으며, 다른 자료의 9월 7일은 음력으로 보입니다.
남도일보에 따르면 문절공 주열(朱悅)의 세 아들 대에서 능성파·웅천파·전주파로 나뉘었습니다. 능성파의 파조는 주인장(朱印長, 1243~1315)이고 화순 능주에 세거했습니다. 웅천파(창원 진해 웅천)와 전주파(전주)는 주인원(朱印遠)·주인환(朱印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두 파의 파조가 각각 누구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위키백과 「주 (성씨)」 문서에는 주현진(朱玄進)이 압해로 분봉되어 압해 주씨로 갈라졌다는 내용이 있으나, 신안 주씨 계통과의 관계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신안주씨대종회는 1800년대 이전부터 능주에서 능성주씨대종회로 운영되었다고 합니다. 위토·재실·선영을 관리하며 청계공·여양공·문절공·정숙공의 시제를 지내 왔습니다. 1969년 11월 20일에 이름을 신안주씨대종회로 바꿨습니다. 1997년 종친회장은 주승각이었으며, 당시 종친회는 논개가 기생이 아니라 최경회 장군의 후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논개의 본관에 대한 근거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공식 홈페이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종친회 카페에 게시된 항렬표는 31세 寧·炯, 32세 中·奎, 33세 宰·鍾, 34세 暾·河, 35세 尤·東 순입니다. 그러나 서양사학자 주경철은 32세 '哲' 항렬로, 제헌 국회의원 주기용은 웅천파 30세 '基' 항렬로 소개되어 위 표와 맞지 않습니다. 파마다 항렬이 다를 수 있으므로 각 파 종중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능성파는 문절공 주열의 아들 주인장(朱印長, 1243~1315)을 1세로 하는 파입니다. 주인장은 예부상서를 지냈고 시호는 정숙입니다.
시조 주잠이 숨어 살았다고 전하는 화순 능주(옛 능성)에 세거했습니다. 능주에는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53호 주자묘가 있으며, 그 경내 동원사는 주인장 등을 모시던 회덕사 자리에 세운 사당입니다.
병자호란 때 의병으로 활동한 주엽(1596~1638)이 능성파 13세이고, 독립운동가 주석환(1893~1955)도 능성파 후손으로 소개됩니다. 대종회가 지내는 정숙공 시제는 주인장의 제사입니다.
웅천파는 주열의 아들 대에서 갈라진 세 파 가운데 하나로,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 웅천 일대에 세거했습니다.
위키백과는 주인장·주인원(朱印遠)·주인환(朱印還) 등이 능성·웅주·전주로 각각 갈려 나갔다고 적습니다. 그러나 웅천파의 파조가 주인원과 주인환 가운데 누구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제헌 국회의원 주기용(1897~1966)이 나무위키에 웅천파 30세 '基' 항렬로 나옵니다.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주기철도 진해 웅천 출신입니다.
전주파는 주열의 아들 대에서 능성파·웅천파와 함께 갈라졌다고 전하는 파로, 전주에 세거했습니다.
파조는 주인원(朱印遠)이나 주인환(朱印還)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다만 두 사람 가운데 누가 전주파의 파조인지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주인원과 주인환은 화순 능주 주자묘 경내 동원사의 옛터인 회덕사에서 주잠·주여경·주열·주인장과 함께 모셔졌습니다.
파(계파) 구분은 문중·족보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우리 집안 파는 족보에서 확인하세요.
주잠(동국 시조), 주열(지도첨의부사·능성군), 주몽룡(임진왜란 때 금산군수), 주석면(1902년 신안 복관을 상소함), 주기철(목사·독립운동가), 주여경(좌승상을 지냈다고 전함), 주인장(능성파 1세), 주요섭(소설가), 주기용(제헌 국회의원), 주경철(서양사학자)
이름을 누르면 인물 상세(생몰·약력·묘소·후손)를 볼 수 있습니다.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정보(공공데이터)를 참고한 신안 주씨 계열 독립유공자입니다. 이름을 누르면 공적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안 주씨 종친회 홈페이지는 한국전자족보도서관 종친회 목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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