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창제에 반대 상소를 올린 집현전 부제학, 청백리
| 생몰 | 1398 ~ 1445 |
| 시대 | 조선 |
| 본관 | 해주 최씨 |
최만리(崔萬理, 1398~1445)는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해주입니다.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 시호는 공혜(恭惠)이며 아버지는 최하(崔荷), 어머니는 충주 지씨(지용수의 딸)입니다. 청렴하고 강직하여 청백리로 선정되었습니다.
141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27년 문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 박사를 거쳐 교리·응교·직제학·부제학을 지냈고, 1439년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뒤 1440년 부제학으로 돌아왔습니다. 세자(문종)의 서연에도 참여했습니다.
1444년 신석조·김문·하위지·정창손 등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언문(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그 대표격이 되었습니다. 세종의 노여움을 사 의금부에 갇히는 일을 겪었고, 같은 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이듬해인 1445년 10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1427년 급제 뒤 20여 년 동안 집현전에서 고제도 연구와 교육에 종사했고,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조선조 청백리』 목록의 세종 대 인물로 부제학 최만리가 올라 있습니다.
상소의 요지는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사대모화에 어긋난다는 점, 이두에 비해 언문은 배움에 이로움이 없다는 점, 널리 의견을 묻지 않고 서둘렀다는 점, 동궁이 언문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점 등입니다. 상소 날짜는 2월 17일 또는 20일로 자료마다 다르게 적힙니다.
세종의 책망과 친국을 받고 투옥되었으나 곧 풀려났다고 합니다. 1444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1445년 10월 23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글 창제를 둘러싼 당시 사대부의 인식을 보여주는 사료로 평가됩니다.
묘소와 사당 강호재가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에 있으며 일대가 해주 최씨 집성촌으로 소개됩니다. 다섯 아들이 여러 파의 파조가 되었고, 후손에 최경창과 최규서가 있다고 전합니다. 율곡 이이의 증외고조부로 설명됩니다.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에 부인 중화 양씨와 합장되었고, 근처에 사당 강호재가 있습니다. 신도비는 1962년 이숭녕이 글을 짓고 후손들이 세웠습니다.
다섯 아들 최각·최정·최당·최은·최연이 각각 현감공파·좌랑공파·생원공파·진사공파·전한공파의 파조로 전합니다. 딸이 덕수 이씨 이의석에게 시집가 후손에서 율곡 이이가 나왔다고 전하며, 이이의 증외고조부로 설명됩니다. 후손에 최경창·최규서가 있습니다.
세종 때 집현전 부제학으로, 1444년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해주 최씨 학자입니다.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이 사대에 어긋난다는 점, 이두에 비해 실익이 적다는 점, 의견 수렴 없이 서둘렀다는 점 등을 들었습니다.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입니다.
다섯 아들이 여러 파의 파조가 되었고, 최경창·최규서가 후손으로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