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때 대사헌·대사성을 지낸 문신, 호는 모당, 풍산 홍씨 모당공계의 중시조
| 생몰 | 1549 ~ 1615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풍산 홍씨 |
홍이상(洪履祥, 1549~1615)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산, 호는 모당(慕堂)입니다. 고려 말 고양 고봉산 기슭에 은거한 홍구의 후손으로, 어린 시절 집안이 몹시 가난했으나 학문에 힘썼다고 전합니다.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합격했지만 출세를 재물을 모을 기회로 삼지 않고 학문과 도의 완성에 뜻을 두었다고 하며, 1579년 식년문과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습니다. 이후 정언·수찬·병조정랑을 지내고 사가독서(독서당 휴가 독서)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참의로서 선조를 호종했고, 1594년 『선조실록』에 따르면 선조가 가토 기요마사 문제를 묻자 왜와의 강화에는 반드시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고 합니다. 이후 대사성·개성부유수를 지냈고,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때에는 붕당으로 갈라진 조정을 걱정하는 글을 올렸습니다. 대사헌에 올랐으며, 경연에서 임금에게 경서를 강론하는 강관 가운데 으뜸이라는 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효성이 깊어 중풍에 걸린 아버지를 오래 정성껏 간호했고, 평생 거친 말을 하지 않았으며 위급할 때도 언행이 온화했다고 전합니다.
부인 안동 김씨와의 사이에 6남을 두었고, 그 아들들이 지계공파(홍방)·감사공파(홍립)·장령공파(홍집)·추만공파(홍영)·판관공파(홍박)·남원공파(홍탁)의 파조가 되어 풍산 홍씨 모당공계를 이루었습니다. 손자 홍주원은 선조의 딸 정명공주의 부마가 되었고, 후손에서 홍봉한·혜경궁 홍씨가 나와 풍산 홍씨는 조선 후기 최고의 명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묘와 신도비는 고양시 성석동에 있고 신도비문은 월사 이정구가 지었다고 합니다. 고양팔현의 한 사람으로 기려져 문봉서원(1688 창건, 1709 사액, 1865 철폐)에서 모셔졌고, 충주 하담리의 하강서원에도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고 합니다.
홍이상은 경전 강론을 맡는 강관으로 선조의 신임이 두터웠다고 하며, 대종회는 그를 당대의 '거유 명신'으로 소개합니다. 한편 그의 문집은 온전히 전하지 않아 그림과 서첩 등 다른 자료로 생애를 보완해야 한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예조참의로 선조를 호종했고, 1594년 가토 기요마사 일을 묻는 선조에게 강화에는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고 『선조실록』은 전합니다. 전쟁 뒤 수습기에는 대사헌으로 일했습니다.
아들 홍방·홍립·홍집·홍영·홍박·홍탁이 각 파의 파조입니다. 이 가운데 홍집·홍박·홍탁은 충주로 옮겨 정착한 것으로 전하고, 홍영의 아들이 정명공주와 혼인한 홍주원입니다.
고양시 성석동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고 합니다(신도비문은 월사 이정구가 지음).
여섯 아들이 모당공계의 여섯 파(지계·감사·장령·추만·판관·남원)를 이루었고, 손자 홍주원과 후손 홍봉한·혜경궁 홍씨로 이어집니다.
1579년 문과 장원으로 급제해 대사성·대사헌을 지낸 조선 중기 문신으로, 풍산 홍씨 모당공계의 중시조입니다.
여섯 아들이 각 파를 이루었고, 손자 홍주원은 정명공주의 부마이며 후손에 홍봉한·혜경궁 홍씨가 있습니다.
고양시 성석동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