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때 우의정을 지낸 고명대신·충장공파 파조
| 생몰 | 1382 ~ 1454 |
| 시대 | 조선 |
| 본관 | 진주 정씨 |
정분은 세종·문종·단종 3대를 섬기며 우의정에 오른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계유정난 뒤 유배지 낙안에서 생을 마쳤다고 전해집니다. 토목·건축에 밝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정분(鄭苯)은 진주를 본관으로 하며 자는 자유(子㕀), 호는 애일당(愛日堂)·성재(省齋)로 알려져 있습니다. 족보에는 1382년(우왕 8)생으로 적혀 있으나 1394년생이라는 설도 있어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여말선초의 문장가 정이오이고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전해집니다. 부인으로는 정인지의 누나인 하동 정씨와 원주 변씨가 거론됩니다.
태종·세종 대에 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좌랑·승문원 교리 등 청요직을 거쳤고, 좌승지·충청도 관찰사·이조참판·평안도 도관찰사를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1443년경에는 공조참판으로 명나라에 주문사로 다녀왔으며, 이후 예조참판·호조판서·의정부 좌참찬·우찬성·좌찬성을 거쳤습니다. 급제 연도는 자료에 따라 1416년(세종 즉위 전후)으로 적히기도 합니다.
정분은 문신이면서 토목과 건축에 밝아 산릉 조성과 숭례문 신축·개축 감독, 하삼도 성곽 점검 등에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서산 해미읍성 축조에도 관여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문종이 1452년 세상을 떠나면서 어린 세자(단종)를 부탁한 대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름이 오르며, 그해 말 우의정에 임명되었습니다. 황보인·김종서와 함께 어린 임금을 보필하는 삼정승 체제에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1453년 계유정난 직전 정분은 삼남 지방의 도체찰사로 내려가 있었고, 단종이 직접 배웅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정난 소식을 들은 뒤 압송되어 전라도 낙안으로 유배되었으며, 처남 정인지가 수양대군 쪽에 서서 회유했으나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정분은 낙안에서 교형(목을 매는 형)에 처해졌다고 전해집니다. 시기는 자료에 따라 1453년 10월 또는 1454년으로 달리 적히며, 사망 지점은 낙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숙종 때 벼슬이 환원되었고, 영조 때(1746년경) 복관되며 충장(忠莊)의 시호가 내려졌다고 전해집니다. 장릉 배식록의 삼상신(三相臣)에 오르고, 공주 일대에 제향되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토목에 밝고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킨 신하로 평가됩니다.
후사는 사촌 정효안의 아들 정지산이 이었다고 하며, 충남 공주 사곡면 호계리에 정려와 사당이 있다고 합니다. 한편 유배 중 몸을 숨겼다는 아들 정광로의 후손이 지석을 근거로 복권을 주장해, 공주계와 광양계 간 논쟁이 이어졌다고 전해집니다. 묘는 진주 상대동에 조부·부친과 함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경남 진주시 상대동에 조부·부친과 함께 있다고 전해지며, 정려와 사당은 충남 공주시 사곡면 호계리에 있다고 합니다.
양자 정지산이 후사를 이었다고 전하며, 공주계·광양계의 계통 논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