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 鄭澈

가사문학의 대가로 꼽히는 조선 중기의 문신·시인

정철 초상
사진: 퍼블릭 도메인 — 정철 초상(조선시대 작자 미상), Wikimedia Commons · Wikimedia Commons
생몰1536 ~ 1594
시대조선
본관연일 정씨

생애 약력

정철(鄭澈, 1536~1594)은 조선 중기의 문신·시인으로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본관은 연일(영일)이다. 1562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강원도·전라도·함경도 관찰사와 예조·형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서인(西人)의 중심 인물로 동서 분당 이후 동인과 격렬히 대립했고, 정여립 사건(기축옥사)을 다스린 위관으로서 평가가 엇갈린다. 1591년 건저(세자 책봉) 문제로 파직되어 명천·진주·강계로 유배되었다가 임진왜란 중에 복귀했다.

우리말을 자유롭게 부려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 등 가사문학의 최고봉을 이루었고, 〈훈민가〉를 비롯한 시조 여러 수를 남겼다. 가사·시조는 《송강가사》에, 한시와 산문은 《송강집》에 전한다.

출생과 어린 시절

1536년(중종 31) 음력 윤12월 6일 한성부 장의동(지금의 서울 청운동 일대)에서 돈녕부 판관 정유침과 죽산 안씨 사이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맏누이는 인종의 후궁인 귀인이었고 둘째 누이는 계림군 이유의 부인이어서, 어려서부터 궁중을 드나들며 훗날의 명종인 경원대군과 가까이 지냈다고 전해진다.

1545년 을사사화로 매형 계림군이 처형되면서 집안이 큰 화를 입어 맏형 정자는 유배지에서 숨지고 아버지도 유배를 갔다. 1551년 무렵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 담양 창평으로 옮겨 살면서 김윤제의 눈에 띄어 그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이후 임억령·송순·김인후·기대승에게도 배웠다. 이이·성혼·송익필과 교유했으며, 김윤제의 외손녀를 아내로 맞았다고 한다.

과거 급제와 초기 관직

1561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562년(명종 17) 별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해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사헌부 지평, 성균관 전적, 좌랑, 현감 등을 거쳤고 함경도 암행어사로도 나갔다. 1567년에는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는 제도)에 선발되어 교분을 깊이 했다.

청렴하고 곧은 성품으로 '총마어사'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동서 분당과 관찰사 시절

1575년 동서 분당이 일어나자 서인 편에 섰고, 동인의 공격을 받아 창평으로 내려가 은거하기도 했다. 1578년 무렵 〈성산별곡〉을 지었다고 한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관동 지방을 돌며 〈관동별곡〉과 〈훈민가〉를 지었고, 1581년 대사성·전라도 관찰사, 1582년 도승지·예조참판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1583년에는 예조판서·형조판서가 되었다.

1584년 이이가 세상을 떠나자 애도했고, 1585년 동인의 공격으로 사직한 뒤 약 4년간 창평에서 지내며 〈사미인곡〉·〈속미인곡〉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기축옥사와 유배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위관(재판을 맡은 대신)이 되어 옥사를 다스렸고, 1590년 좌의정과 인성부원군에 올라 공신에 책록되었다. 이 옥사로 많은 동인이 처형·유배되어, 서인은 모반을 진압한 일로, 동인과 후대 일부는 서인이 사건을 과장·조작했다는 점에서 정철을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인물로 본다.

1591년 선조의 후사 문제로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을 세자로 세울 것을 건의하기로 했으나 이산해가 약속을 어겨 홀로 주청하게 되었고, 선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이어 동인의 탄핵으로 명천에 유배되었다가 진주를 거쳐 강계로 옮겨져 위리안치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죽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름을 받아 의주까지 선조를 호종했고 체찰사로도 활동했으나, 술 때문에 직무에 소홀하다는 비판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1593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사직하고 강화도 송정촌에서 지내다가 그해 12월(양력 1594년 2월) 세상을 떠났다. 향년은 자료에 따라 58세 또는 59세로 적는다.

사후 1594년에 탄핵으로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광해군 때인 1609년 신원되고 1624년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685년 시호 문청(文淸)이 내려졌다. 1691년 다시 삭탈되었다가 1694년 회복되는 등 정치 상황에 따라 평가가 오르내렸다. 창평 송강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대표 작품 — 원문(발췌)과 풀이

정철의 대표작은 우리말로 쓴 가사(歌辭)로,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이 특히 널리 읽힙니다. 이 네 편은 시조가 아니라 가사이고, 시조로는 〈훈민가〉 16수가 유명합니다. 아래는 각 작품의 첫머리(서사)를 읽기 쉬운 현대 표기로 옮긴 발췌와 풀이이며, 정확한 원문 표기는 판본(《송강가사》)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관동별곡〉(關東別曲)

1580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해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한 길을 노래한 기행 가사.

강호(江湖)에 병이 깊어 죽림(竹林)에 누웠더니,
관동(關東) 팔백 리에 방면(方面)을 맡기시니,
어와 성은(聖恩)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연추문 달려 들어 경회 남문 바라보며,
하직(下直)을 숙배하니 옥절(玉節)이 앞에 섰다.
평구역 말을 갈아 흑수로 돌아드니,
섬강은 어디메오, 치악이 여기로다.
소양강 내린 물이 어드러로 든단 말고.
고신거국(孤臣去國)에 백발도 하도할샤.

풀이 — 자연 속에서 병들어 누워 지내던 나에게 임금께서 관동 팔백 리를 다스리라 명하시니 그 성은이 끝이 없다. 궁궐 문을 달려 들어가 임금께 하직 인사를 올리자 관찰사의 부절이 앞에 놓였다. 평구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흑수(여주 일대)를 돌아 지나니 섬강과 치악산이 눈앞이다. 소양강 흐르는 물은 어디로 가는가, 임금 곁을 떠나온 외로운 신하의 흰머리는 더 늘어난다.

〈사미인곡〉(思美人曲)

1585년 무렵 창평에 물러나 있을 때,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님 그리는 여인'에 빗대어 사계절에 걸쳐 노래한 연군 가사.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따라 삼기시니,
한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젊어 있고 님 하나 날 괴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데 전혀 없다.
평생에 원하오되 함께 살자 하였더니,
늙어서 무슨 일로 외따로 두고 그리는고.
엊그제 님을 뫼셔 광한전에 올랐더니,
그 사이에 어찌하여 하계에 내려오니,
올 적에 빗은 머리 헝클어진 지 삼 년이라.
연지분 있지마는 누구 위해 곱게 할꼬.
마음에 맺힌 시름 첩첩이 쌓여 있어,
짓는 게 한숨이요 지는 게 눈물이라.

풀이 — 이 몸이 태어날 때 님을 따라 태어났으니 한평생 맺어진 인연이며 하늘이 아시는 일이다. 나 하나를 님께서 사랑해 주셨으니 이 마음과 사랑에 견줄 데가 없다. 평생 함께하자 했는데 늙어서 무슨 까닭으로 홀로 두고 그리워하게 하시는가. 엊그제 님을 모시고 광한전(임금 곁)에 올랐는데 어쩌다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올 때 빗은 머리가 헝클어진 채 삼 년이 되었다. 연지와 분이 있어도 누구를 위해 곱게 단장하겠는가. 마음에 맺힌 근심이 겹겹이라, 나오는 것은 한숨이요 흐르는 것은 눈물이다.

〈속미인곡〉(續思美人曲)

〈사미인곡〉의 속편으로, 두 여인이 주고받는 대화체로 임금을 향한 그리움과 충정을 노래한 작품.

저기 가는 저 각시 본 듯도 한저이고.
천상 백옥경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 다 저문 날에 누구를 보러 올라가는고.
어와 너로구나, 내 사설 들어 보오.
내 얼굴 이 거동이 님 괴얌 즉도 한가마는,
어쩐지 날 보시고 너로다 여기실새,
나도 님을 믿어 딴뜻이 전혀 없어,
이래야 교태야 어지러이 구옵디니,
반기시는 낯빛이 옛날과 어찌 다르신고.
누워 생각하고 일어나 앉아 헤아려 보니,
내 몸의 지은 죄 산같이 쌓였으니,
하늘이라 원망하며 사람이라 탓하랴.

풀이 — (한 여인이 묻는다) 저기 가는 저 각시, 어디서 본 듯하구나. 하늘 위 옥황의 서울을 어찌 떠나와, 해가 다 저문 날에 누구를 보러 올라가는가. (다른 여인이 답한다) 아, 당신이구려, 내 이야기를 들어 보오. 내 얼굴과 이 모습이 님께 사랑받을 만하다 하겠으나, 어쩐지 나를 보시고 달리 여기셨소. 나는 님을 믿어 딴마음이 없이 정성껏 애를 썼는데, 반겨 주시던 낯빛이 옛날과 어찌 이리 다르신가. 누웠다 앉았다 곰곰이 헤아려 보니 내 몸이 지은 죄가 산처럼 쌓였으니,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하겠는가.

〈성산별곡〉(星山別曲)

1560년대 후반~1570년대에 창평 성산에서 식영정·서하당 주인 김성원을 위해 지은 것으로 전하며, 성산의 사계절 풍경과 은거의 멋을 노래한 가사.

엊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도화(桃花) 행화(杏花)는 석양리(夕陽裏)에 피어 있고,
녹양방초(綠楊芳草)는 세우(細雨) 중에 푸르도다.
칼로 말아 낸가 붓으로 그려 낸가,
조화신공(造化神功)이 물물마다 헌사롭다.

풀이 — 엊그제 겨울이 지나고 새봄이 돌아오니, 복사꽃과 살구꽃은 저녁 볕 속에 피어 있고 푸른 버들과 향기로운 풀은 가랑비 속에 푸르다. 칼로 마름질해 낸 것인가 붓으로 그려 낸 것인가, 조물주의 신묘한 솜씨가 사물마다 야단스럽게 드러난다.

※ 위 발췌는 작품의 일부이며, 풀이는 뜻을 쉽게 풀어 쓴 의역입니다. 전문과 정확한 표기는 《송강가사》 등 판본을 확인하세요. 〈성산별곡〉의 창작 시기와 대상은 학설에 따라 다릅니다.

평가와 일화

정철의 가사는 한문투를 벗어나 우리말의 결을 자유롭게 살리고 호방하면서도 애절한 정서를 담아, 가사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습니다. 시조에서도 윤선도와 함께 쌍벽으로 꼽히며, 77수가 《송강가사》에 전한다고 합니다.

성격은 곧고 감정이 솔직했던 반면 음주로 인한 비판도 따랐으며, 동인에게는 큰 미움을 받아 격한 별명으로 불렸다고 전합니다. 기축옥사의 책임과 공정성은 오늘날에도 논쟁거리입니다.

일화로는, 조헌이 처음에는 정철을 피했으나 이이의 중재로 함께 일하며 화해했다는 이야기, 강릉에서 백성이 내온 탕에 든 물고기에 '꾹저구'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집니다.

참고: 나무위키·위키백과 등 공개 자료(자료마다 연도·서술이 엇갈리는 부분은 위처럼 병기했습니다).

묘소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 처음 경기도 고양 신원에 묻혔다가 1665년 이장했다고 전한다. 송시열이 짓고 김수흥이 쓴 신도비가 있으며, 묘소는 1996년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후손

맏아들 정기명이 1589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연일 정씨 문청공파(시호 문청)의 중시조로 받들어진다.

참고 영상

KBS 한국사전 – 시인은 왜 당쟁의 투사가 되었나, 송강 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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