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鄭夢周

고려 말의 문신·성리학자, 삼은(三隱)의 한 사람, 호 포은(圃隱)

정몽주 초상
사진: 퍼블릭 도메인 (이한철 그림, 1880년) · Wikimedia Commons
생몰1337 ~ 1392
시대고려
본관연일 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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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약력

연일 정씨(영일 정씨)로 호는 포은(圃隱)이다.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성균관 대사성 등을 지냈고 수문하시중에 올랐으며 명·일본과의 외교에서 활약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祖宗)'으로 일컬어졌으며,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주자가례》에 따른 예제와 법제 정비에 힘썼다. 문집으로 《포은집(圃隱集)》이 전한다.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켜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반대하다가 1392년 이성계 문병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 측 조영규 일파에게 철퇴로 피살되었다. 이방원이 회유의 뜻으로 건넨 〈하여가〉에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는 〈단심가〉로 답하며 절개를 지킨 일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후 경기도 용인 능원리로 이장되었다.

출생과 가문

1337년 음력 12월(양력 1338년 1월) 경상도 영일현(지금의 포항 일대)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집니다. 다만 출생지를 두고 영천시와 포항시가 서로 주장하는 논쟁이 있습니다. 본관은 연일(영일) 정씨, 아버지는 정운관, 어머니는 영천 이씨입니다. 초명은 몽란·몽룡이었다가 몽주로 고쳤고,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文忠)입니다.

대대로 관직을 지낸 지방 사족 집안으로 비교적 넉넉한 환경에서 자랐고,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3년 동안 묘소를 지키는 시묘살이를 하여 공민왕의 포상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어린 시절의 일화로 아홉 살 때 여종을 위해 연애편지를 대신 써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사실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학문과 과거 급제

아버지의 인연으로 이색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고, 같은 문하의 정도전·조준·남은 등과 교유했습니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했고,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 토벌에 참여했으며 예문관 검열 등을 지냈습니다. 1371년에는 성균관 사성에 올랐습니다.

외교 활동

1368년 명나라가 세워지자 명과의 국교를 맺을 것을 주장했고, 1372년 명에 다녀오던 길에 배가 난파해 표류했으나 구조되어 명 태조의 도움으로 귀국했다고 전해집니다. 1375년 이인임의 친원 외교를 비판하다 언양으로 유배되었고 1377년 풀려났습니다.

1377~1378년에는 일본에 보빙사로 가서 규슈 탄다이와 교섭해 왜구의 약탈 금지를 요청하고 잡혀 갔던 고려 사람들을 데려왔습니다(포로 규모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1381년부터 1387년 사이에도 여러 차례 명에 사신으로 가 세공 감면과 밀린 공물 면제를 얻어 냈다고 합니다.

이성계와의 협력

1380년 황산대첩에 참여했고, 이후 여러 차례 이성계와 함께 출정하며 긴밀히 협력했습니다. 같은 해 이성계가 전주 오목대에서 새 나라를 세울 뜻을 내비치자 자리를 떠나 울분의 시를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나, 후대 서술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에는 찬성한 것으로 기록됩니다.

개혁 정책과 공양왕 옹립

1387년 관리의 복식을 중국 제도에 맞추고,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며 유학과 성균관 진흥에 힘썼습니다. 《주자가례》에 따른 가묘 설치와 오부학당·향교 설립을 장려했습니다. 1389년에는 이성계 일파와 함께 우왕·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우는 일(폐가입진)에 적극 나서 공신에 책록되었고, 1390년 수문하시중에 올라 이성계와 함께 정승 자리를 맡았습니다. 흉년에 대비해 의창을 다시 세웠고, 1391년에는 《대명률》과 고려 법령을 참작한 새 법령을 정하려 했습니다.

선죽교의 최후(1392)

1392년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해 황주에 머물자 정몽주는 이를 기회로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방원의 대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방원이 시조로 뜻을 떠보자 〈단심가〉로 답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 일화는 후대 기록에 전하는 것이라 사실 여부에 대한 이견도 있습니다.

음력 4월 4일 이성계의 집을 문병하고 돌아오던 길에 개경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일파에게 철퇴를 맞고 숨졌습니다. 향년은 자료에 따라 54세 또는 56세로 적습니다. 직후에는 역적으로 몰렸으나 시신이 수습되어 뒤에 경기도 용인으로 옮겨 묻혔습니다.

사후의 평가와 추증

1401년(태종 1) 태종이 영의정부사를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했습니다. 정도전 세력을 낮추고 충절의 본보기를 내세우려는 정치적 뜻이 있었다는 해석이 함께 전합니다. 1517년(중종 12) 문묘에 종사되었고, 1555년 임고서원을 비롯한 여러 서원에 모셔졌으며, 1699년(숙종 25) 신도비가 세워졌습니다. 2003년 문화관광부가 문화인물로 선정했습니다.

사상·저술·제자

불교를 비판하고 성리학 보급에 힘쓴 일로 '동방 이학(理學)의 조종'으로 불립니다. 제자로는 길재·이숭인·권근·변계량·권우 등이 거론되며, 이들을 통해 조선 초 사림과 세종 때의 학풍으로 이어졌다고 설명됩니다.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꼽힙니다. 시문집 《포은집》이 전하며, 《포은시고》는 아들 정종성과 동생 정도가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족과 평가

동생으로 정과·정후·정도가 있고, 부인은 경주 이씨, 아들은 정종성·정종본이며 서자로 정종화·정종함을 두었다고 합니다. 아들 정종성은 효자로 알려졌으나 아버지가 처형된 뒤 집안의 재산이 몰수되어 고초를 겪었다고 전합니다.

대체로 고려 사직을 지킨 충신이자 외교·실무에 능한 정치가로 평가받지만, 우왕·창왕 폐위에 가담했고 충절의 이미지가 후대 정치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습니다. 최근에는 충신의 이미지뿐 아니라 제도 개혁과 행정 능력에도 주목하는 연구가 늘고 있습니다.

참고: 나무위키·위키백과 등 공개 자료(출생·사망 나이 등은 자료마다 달라 병기했습니다).

묘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후손

아들 정종성(鄭宗誠, 1374~1442) 등 후손이 있으며 연일 정씨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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