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법천에 은거한 퇴계학파 학자, 『우담집』·『산중일기』 저자, 호는 우담
| 생몰 | 1625 ~ 1707 |
| 시대 | 조선 후기 |
| 본관 | 나주 정씨 |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나주, 자는 군익(君翊), 호는 우담(愚潭)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대사헌 정윤복의 증손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정언황, 어머니는 횡성 조씨로 직제학 조정립의 딸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를 성리학자로 소개하며 「임오록」, 「만록」, 「산중일기」 등을 남겼다고 정리합니다.
그는 강원도 원주 법천으로 내려가 평생 벼슬을 멀리했습니다. 이현일, 이유장 등과 교유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헌부 집의, 성균관 사업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했습니다. 다만 1690년(숙종 16)에는 「만언소」를 올려 여섯 조목을 건의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 관직이 삭탈되었고, 이후 세자시강원 진선으로 나아갔습니다. 1691년 기사환국 때에는 인현왕후 폐위가 잘못이라는 상소를 올려 다시 삭탈관직을 당했으며, 1696년에는 희빈 장씨를 정비에서 희빈으로 강등한 조치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합니다.
학문에서는 이황의 이기론과 사단칠정론을 정밀하게 분석해 이(理)를 주인, 기(氣)를 보좌로 보는 이주기보설을 전개했고, 「사칠변증」에서 이이의 성리설을 41개 조목으로 나누어 비판했습니다. 1700~1702년에는 제자 이식과 인물성의 같고 다름을 두고 3년간 논변을 벌였는데, 이 논변은 훗날 호락논쟁의 선행 논의로 평가됩니다. 정약용은 그를 정구와 장현광 이후의 참된 순수 유학자로 꼽았다고 백과사전은 소개합니다.
『산중일기』는 1686년부터 1688년까지 전국의 명산과 사찰을 돌며 쓴 기록입니다. 1707년(숙종 33)에 세상을 떠났고, 사후 원주 광암사에 제향되었다고 합니다. 제자로는 이식, 황수일, 이만부, 권두경이 꼽히며, 현손이 형조판서 정범조입니다.
학행으로 사헌부 집의와 성균관 사업에 천거되었지만 모두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숙종 때 국정이 흔들릴 때는 상소로 의견을 밝혔고 그 때문에 삭탈관직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사칠변증」에서 이이의 이통기국과 기발일도설에 반대하고 이황의 이발설을 옹호했습니다. 이 견해는 율곡학파와 퇴계학파가 맞서던 학계의 흐름 속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1700~1702년 제자 이식과 3년간 인물성이 같은지 다른지를 논했습니다. 정시한은 사람과 사물의 성이 다르다는 인물성상이론을 폈고, 이는 호락논쟁의 선행 논의로 평가됩니다.
1686~1688년 전국의 명산과 사찰을 둘러본 기록으로, 명산과 사찰을 직접 찾아다니며 쓴 유람기입니다.
묘소의 위치는 이번 자료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사후 원주의 광암사에 제향되었다고 대종회와 백과사전이 전합니다.
아버지는 정언황이고, 아들 정도겸이 1660년 문과에 올랐다는 기록이 대종회 등과자 총람에 있습니다. 현손(4대 후손) 정범조가 형조판서에 올랐습니다.
원주 법천에 은거한 퇴계학파 학자로 호는 우담이며 『우담집』과 『산중일기』를 남겼습니다.
정범조는 정시한의 현손(4대 후손)입니다.
이이의 성리설을 41개 조목으로 나누어 비판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