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명종 때 병조판서·좌찬성을 지낸 문신, 호는 월봉, 시호는 공안

| 생몰 | 1486 ~ 1549 |
| 시대 | 조선 전기 |
| 본관 | 나주 정씨 |
정옥형(丁玉亨, 1486~1549)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나주, 자는 가중(嘉仲), 호는 월봉(月峰), 시호는 공안(恭安)입니다. 월헌 정수강의 아들이며 정응두의 아버지로, 나주 정씨 13세입니다. 위키백과는 명종 때 좌찬성을 지냈다고 소개하고, 나주정씨대종회는 월헌공의 둘째 아들로 적습니다.
1513년(중종 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부정자로 출발했고, 예문관 주서, 홍문관 수찬·교리,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을 거쳤습니다. 중종 때 왕이 문학과 재덕이 뛰어난 인재를 뽑아 입대하게 하자 교리 신광한과 함께 뽑혀 어전에서 주역과 치도를 강론했다고 대종회가 전합니다. 이후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도승지를 지냈고 호조참판으로 재상 반열에 올랐습니다.
1533년 대사헌이 되었다가 곧 파직되고 대사간이 되었으나, 당시 권신 김안로에게 아부하지 않아 충청도·전라도 관찰사 등 외직으로 나갔다고 대종회는 설명합니다. 1536년 병조참판으로 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539년에는 공조판서에 올라 정경 반열에 들었습니다. 이어 우참찬, 형조·예조판서, 좌참찬을 거쳐 1544년 병조판서가 되었습니다. 대종회는 형조판서 때 법령 조목의 앞뒤 모순을 조절한 『대전후속록』을 저술했다고 적습니다.
1545년 을사사화 때에는 소윤 쪽에 가담해 대윤 제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보익공신 3등에 책록되고 금천군에 봉해졌습니다. 이 공신 책록과 가담은 후대에 평가가 엇갈리는 대목입니다. 1546년 우찬성을 거쳐 좌찬성에 올랐으나 병으로 물러나 1549년 세상을 떠났고, 공안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1513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516년 기사관, 1518년 홍문관 교리를 지냈습니다. 위키백과는 그가 헌납·시독관·지평·교리 등 언관과 경연 관직을 두루 지내고 1525년 홍문관 직제학, 부제학을 거쳐 당상관에 올랐다고 연도별로 정리합니다.
1533년 도승지·호조참판·대사헌을 거치던 중 권신 김안로의 집권기를 맞았고, 이후 충청도·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고 전합니다. 위키백과의 신도비 항목은 김안로의 권세가 심해지자 조정을 떠나 외지를 돌며 민심을 두루 살폈다고 설명합니다.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한 1545년 을사사화에서 소윤 쪽에 서서 대윤 세력을 제거하는 데 협력했고, 그 공으로 보익공신 3등과 금천군에 책봉되었다고 합니다. 한때 공신 책록이 삭탈되었다가 곧 우찬성, 좌찬성으로 복귀했다는 서술이 대종회 자료에 있습니다. 이 사화에 윤임 등이 희생되었다는 점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정옥형과 정응두 부자의 신도비는 용인 제일리 나주정씨 선영 입구의 비각에 나란히 서 있습니다. 두 비는 같은 양식이지만 정옥형의 비 지붕돌에는 기왓골이 새겨져 있다고 설명되며, 1996년 12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나주정씨 선영이 있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제일리에 신도비가 있습니다. 정옥형의 신도비는 1584년(선조 17), 아들 정응두의 신도비는 1728년(영조 4)에 세워져 함께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1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원래 고양에 있다가 용인으로 옮김).
아들 정응두가 좌찬성·판중추부사에 올랐고, 손자 정윤조·정윤희·정윤우·정윤복 형제가 이어 활약했습니다. 아버지는 정수강입니다.
중종·명종 때 병조판서와 좌찬성을 지낸 나주 정씨의 문신으로, 시호는 공안입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소윤에 가담해 대윤을 제거하는 데 협력한 공으로 보익공신 3등에 책록되며 금천군에 봉해졌습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제일리에 아들 정응두의 신도비와 함께 있으며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1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