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9년 정여립의 모역을 고변해 평난공신 1등에 오른 관료, 상산군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상주 박씨 |
박충간(朴忠侃)은 조선 중기의 관료로 본관은 상주입니다. 자는 숙정(叔正)이고 아버지는 박세후입니다. 정확한 생몰년은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으며, 사마방목에 병오년(1546년으로 보이는 가정 25년)의 생원진사시 기록이 가계 근거로 제시됩니다.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청환직을 거쳤고, 1584년(선조 17) 호조정랑에 올랐습니다.
그의 이름을 역사에 올린 것은 1589년(선조 22)의 일입니다. 재령군수로 있던 그는 한준·이축·한응인과 함께 정여립의 모반을 고변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수년간 이어진 기축옥사(己丑獄事)의 발단이 되어 동인 계열 선비들이 큰 피해를 입었으므로, 후대의 평가는 갈립니다. 어쨌든 그 공으로 형조참판에 오르고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졌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로서 여러 성의 수축을 맡아 서울로 올라오는 왜적에 대비했지만, 왜병과 싸우다 도망한 죄로 파면되었고 이듬해에는 분호조판서에서도 파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영남·호남에 파견되어 군량미 조달을 맡았고, 1594년에는 진휼사가 되어 쌀과 콩을 신속히 마련하자고 상소하며 굶주린 백성을 구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1597년 순검사와 선공감 제조를 지냈으나, 1599년에는 충훈부의 쌀·소금 등을 사적으로 이용했다는 이유로 한때 불우했습니다. 1600년에는 남이공 등의 파당 행위의 폐해를 상소했다가 집권층의 미움을 사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들 박치의와 박치인은 훗날 강변칠우로 알려지게 됩니다. 『선조실록』 23권 1589년 12월 29일 기사에 공신 책록 전교가 실려 있습니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을 고변한 공으로 평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상산군에 봉해졌습니다.
묘소의 위치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아들로 박치의·박치인이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