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지주·실업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인물
| 생몰 | 1885 ~ 1956 |
| 시대 | 일제강점기 |
| 본관 | 달성 서씨 |
서병주(徐炳柱, 1885년 10월 6일~1956년 3월 18일)는 일제강점기의 관료이자 실업가로, 본적은 경상북도 대구부 삼덕동이고 본관은 달성입니다. 당시 대구 지역의 대지주이자 지역 유력자의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1913년 도로 용지로 쓸 토지를 기부한 대가로 조선총독부로부터 목배(木杯)를 받았고, 1921년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내지관광단에 참가했습니다. 1923년 대구부협의원에 임명되었고 1927년에는 대구부 학교조합평의원으로 선임되었습니다.
실업계에서는 1925년부터 1937년까지 조양무진주식회사 이사를 지냈고, 1927년 연호제수리조합 창립위원을 거쳐 1931년부터 1939년까지 연호제수리조합과 해안수리조합의 조합장을 맡았습니다. 1932년 영남명덕회 이사에 선임되었고, 1933년과 1937년에는 경상북도 관선 도회의원으로 뽑혔습니다. 1938년 경북지주생산보국회를 조직했으며 1939년에는 경북무진·경북상공·경북흥산 주식회사의 이사를 겸했습니다. 같은 해 6월부터 1940년 8월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에 선임되었습니다.
1940년 인삼 암거래 혐의로 징역 6개월과 벌금 6,000원을 선고받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광복 이후인 1949년 3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경북지부를 찾아 자신을 반민피의자로 조사해 달라고 요청하며 자수하였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가운데 중추원 부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항목은 위키백과가 소개한 공적 기록을 사실 위주로 정리한 것이며, 평가는 독자의 몫으로 남깁니다.
대구부협의원, 학교조합평의원, 경상북도 관선 도회의원 등 지방 자문기관의 직책을 맡았다고 합니다.
무진회사 이사와 수리조합 조합장을 지냈고 경북지주생산보국회를 조직했습니다.
1939~1940년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광복 후 반민피의자로 조사받기를 자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실 중심으로만 소개합니다.
묘소의 위치는 이 자료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대구의 대지주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