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친 고려 말의 무장, 조선 개국원종공신, 시호 정평, 정평공파 파조
| 생몰 | 1337 ~ 1403 |
| 시대 | 고려 말~조선 초 |
| 본관 | 단양 우씨 |
우인열(禹仁烈, 1337~1403)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으로 본관은 단양이며, 위키백과에는 우인렬로 읽기도 합니다. 시호는 정평(靖平)입니다. 증조부는 우천석, 조부는 밀직사부사 우팽이고, 동생 우희열은 문숙공파의 파조입니다. 단양 우씨 정평공파의 파조이며 시조 우현의 10세손이라고 합니다.
고려에서 도평의 녹사로 출신(出身)했으며, 1359년(공민왕 8)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공을 세워 감찰어사가 되었습니다. 1372년 제주체찰사, 1373년 판선공시사를 지냈고 1375년(우왕 1) 응양군 상호군이 되었습니다. 1377년 경상도 원수 겸 합포 도순문사로 나가 왜구를 토벌했고, 1378년에는 경상·양광·전라 삼도도체찰사로서 화살을 맞고도 역전해 적을 크게 깨뜨려 우왕이 술과 안장 얹은 말을 내렸습니다. 1379년 경상도 상원수로 나가 합포로 침입한 왜적을 격퇴했고, 울주·동래·사주·반성현 등지에서 배극렴·박수경·오언 등과 함께 여러 차례 왜구를 베거나 사로잡았습니다.
1385년 서북면도순문사, 1387년 문하평리 상의로서 한양산성 수축과 전함 수리를 감독했습니다. 1388년(창왕 즉위) 문하찬성사로서 설장수와 함께 명나라에 들어가 창왕의 즉위를 알렸습니다. 1390년 계림윤이 되었으나 김저의 옥사에 연루되었다는 탄핵으로 청풍군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고, 윤이·이초의 무고로 청주옥에 갇혔다가 이듬해 석방되었습니다. 조선이 서자 개국원종공신에 녹훈되고 판삼사사를 거쳐 검교좌정승에 올랐습니다. 정평공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만우리를 집성촌으로 삼았다고 전합니다.
우인열 집안은 증조부 우천석과 조부 우팽을 거쳐 이어졌고, 우팽과 우천석의 묘소는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충주가 후손의 세거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형제인 우희열과 우숭렬이 각각 관찰사와 종부시 판사를 지내 한 집안에서 무반과 문반이 함께 나온 점도 눈에 띕니다.
1377년 경상도 원수로 나간 뒤 1378년 삼도도체찰사로 화살을 맞고도 싸워 승리했고, 1379년에도 합포·울주·동래·사주 등지에서 왜구를 격퇴했습니다.
1390년 김저의 옥사에 연루되었다는 탄핵으로 청풍군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고, 이초의 무고로 청주옥에 갇혔다가 다음 해 석방되었습니다. 조선이 서자 개국원종공신이 되었습니다. 같은 집안의 우현보와 함께 고려 말 단양 우씨의 두 축입니다.
묘소의 위치는 이번 자료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정평공파 후손이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만우리에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전합니다.
동생 우희열은 문숙공파 파조이며, 후손이 정평공파를 이룹니다.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친 무장으로 조선 개국원종공신이 되었고, 시호는 정평이며 정평공파의 파조입니다.
우인열의 동생이 문숙공파 파조 우희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