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의 성리학자·문신, 충선왕에게 극간한 도끼 상소로 알려진 역동선생

| 생몰 | 1262 ~ 1342 |
| 시대 | 고려 후기 |
| 본관 | 단양 우씨 |
우탁(禹倬, 1262~1342)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단양입니다. 자는 천장(天章)·탁보(卓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이며, 뒷날 역학에 밝았다고 해서 역동선생(易東先生)으로 불렸습니다. 시호는 문희(文僖)로 전합니다. 단양 우씨 시조 우현의 7대손이고, 남성전서를 지내고 문하시중에 추증된 우천규의 아들입니다. 생년은 자료에 따라 1262년과 1263년으로 갈립니다.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가 되고 과거에 급제해 영해사록이 되었으며, 영해사록으로 있을 때 백성을 현혹하던 요신의 신사를 없앴다고 합니다.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던 해 감찰규정이 되었는데, 그해 11월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 숙창원비와 통간하자 흰옷 차림으로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에 들어가 극간했습니다. 같은 때 함께 간언한 이조전서 오연경은 연일로 쫓겨났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우탁은 곧 고향으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습니다. 충숙왕과 신하들이 그 충의를 가상히 여겨 여러 번 불러 다시 벼슬길에 나섰고, 성균좨주로 치사했습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예안(지금의 경북 안동 일대)에 은거하며 후진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중국을 거쳐 들어온 정이천의 《역전》(정전)을 깊이 연구했는데, 처음에는 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문을 닫아걸고 한 달 남짓 파고든 끝에 해독해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전합니다. 경전과 역사에 통달했고 특히 역학에 밝아 점괘가 맞지 않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며, 한국 성리학의 초기 전래에 큰 몫을 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늙음을 한탄한 시조 〈탄로가〉도 그의 작품으로 전해집니다.
1308년 감찰규정이던 우탁은 충선왕의 행실을 바로잡으려 흰옷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궁궐로 들어갔다고 전합니다. 이를 흔히 지부상소의 본보기로 이야기하며, 같은 일로 간언한 오연경은 쫓겨났다고 합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예안에서 정이천의 《역전》을 풀어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전합니다. 한국 성리학의 초기 수용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입니다. 같은 집안의 우현보와 함께 고려 말 단양 우씨를 대표합니다.
단양 팔경의 하나인 사인암은 그가 사인 벼슬을 하며 휴양하던 곳이라 해서 이름이 붙었다고 전합니다. 1570년 이황의 발의로 안동에 그를 모신 역동서원이 세워졌고, 1684년 사액을 받았으나 서원철폐 때 헐렸다가 1969년 현재 위치에 다시 세워졌다고 합니다.
묘소의 위치는 이번 자료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경북 안동 예안에 머물며 후학을 가르쳤고, 그를 기리는 역동서원이 안동에 있습니다. 안동의 역동유허비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호입니다.
아버지는 우천규이고, 단양 우씨 중시조 우중대의 손자입니다. 우중대의 셋째 아들 우천석은 그의 숙부이며, 우천석의 증손이 우현보와 우인열입니다.
고려 후기 단양 우씨의 문신이자 학자로, 충선왕에게 도끼를 들고 극간한 일과 정이천의 《역전》을 풀어 가르친 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단양 팔경의 하나인 사인암은 그가 사인 벼슬로 있을 때 휴양하러 갔던 곳이라 해서 이름이 붙었다고 전합니다.
1570년 이황의 발의로 안동에 세워진 우탁의 서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