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이씨의 중시조,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고려 고종 때 사람

| 시대 | 고려 |
| 본관 | 성주 이씨 |
이장경(李長庚)은 성주 이씨의 중시조로, 고려 고종 때 사람입니다. 생몰 연대는 전하지 않으며, 신라 말 재상 이순유의 12세손이고 이득희(李得禧)의 아들로 성주(옛 경산)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위키백과는 그를 성주의 호족으로 소개하며, 생전에 상호장과 안일호장을 지냈다고 적습니다.
이름에 얽힌 전승이 있습니다. 아버지 이득희가 문창성이 경산에 떨어지는 태몽을 꾸고 아들을 낳아 문창성·태백성의 다른 이름인 장경(長庚)이라 지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성주군수로 부임한 합천 이씨 이약(李若)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기 딸과 혼인시켰으며, 이 부인에게서 아들 다섯이 태어났다고 전합니다. 이는 문중과 위키백과가 함께 전하는 이야기이지만 설화적 색채가 있어 사실과 구분해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섯 아들은 장남 이백년(밀직사사), 차남 이천년(참지정사), 3남 이만년(문하시중), 4남 이억년(개성유수), 5남 이조년(정당문학)으로, 모두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아들들이 출세하자 고려 조정은 그에게 삼중대광 문하좌시중 흥안부원군 등을 추증했고, 손자 이승경이 원나라에서 이름을 얻자 원 조정이 다시 농서군공으로 추봉했습니다. 후손들은 이 칭호를 따라 '농서 이씨'라 하기도 했습니다.
이장경의 가문이 크게 일어난 것은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면서입니다. 위키백과 성주 이씨 항목에는 장남 이백년이 밀직사사, 차남 이천년이 참지정사, 3남 이만년이 문하시중, 4남 이억년이 개성유수, 5남 이조년이 정당문학에 올랐다고 정리되어 있습니다. 직함은 나무위키 등에서 조금씩 다르게 적기도 합니다. 딸은 이창간에게 출가했다고 전합니다. 문중은 중시조 이후 8세 이내에 대제학 18명, 정승 15명, 문과 급제자 75명이 나왔다고 헤아립니다.
이장경의 묘는 본래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에 있었다고 합니다. 세종 때 이곳이 왕자들의 태를 묻을 태실 자리로 정해지자 세종의 특명으로 길지를 택해 옮겼다고 위키백과는 전하고, 지역 신문 칼럼은 그 해를 1443년, 옮긴 곳을 대가면 옥화리 능골로 적습니다. 지금 성주 월항면에는 세종대왕자태실이 남아 있습니다. 옥화리 능골 곁의 재실 오현재에서는 시조 이순유와 중시조 이장경을 함께 모신다고 합니다.
본래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에 모셨으나, 그 자리에 세종의 왕자 태실이 들어서면서 1443년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 능골로 옮겼다고 전합니다. 곁의 재실 오현재에서 시조 이순유와 함께 모십니다.
다섯 아들이 밀직공파·참지공파·시중공파·유수공파·문열공파의 파조가 되었고, 손자 이승경(원나라 급제), 이조년의 손자 이인복·이인임, 증손 이제 등으로 이어집니다.
성주 이씨의 중시조로, 고려 고종 때 사람이며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 가문을 일으켰습니다.
손자 이승경이 원나라에서 벼슬하자 원 조정이 이장경을 농서군공에 추봉했고, 이 칭호를 따라 가문을 농서 이씨라 부르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