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李舜臣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의 명장, 초대 삼도수군통제사, 시호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초상
AI 생성 참고 이미지 — 실제 초상이 아닙니다 (현존하는 당대 초상이 없어 후대 상상에 근거한 일러스트)
생몰1545 ~ 1598
시대조선
본관덕수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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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약력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545년 한성 건천동에서 태어나 1576년 무과에 급제했고, 함경도 변방과 발포 수군만호, 정읍 현감 등을 거쳐 1591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발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사천·한산도·부산포 등에서 연전연승하며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했고, 1593년 초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7년 모함으로 파직·투옥되어 백의종군하던 중 칠천량 패전 뒤 통제사에 복귀했고, 열세 척의 배로 명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598년 11월 19일(음력) 노량 해전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다 전사했다. 진중에서 쓴 《난중일기》(국보 제76호)는 임진왜란 연구의 핵심 사료이며, 아산 현충사와 통영 충렬사, 한산도 제승당 등에 그를 기리는 공간이 있다.

Imagined depiction of the turtle ship (geobukseon) — AI-generated illustration; no original blueprint survives
거북선 상상도 — AI 생성 이미지(실물 도면이 남아있지 않아 후대 상상을 바탕으로 재구성)

출생과 가문

이순신(李舜臣)은 1545년(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양력 4월 28일) 한성부 건천동(乾川洞,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 일대)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입니다. 아버지는 이정(李貞), 어머니는 초계 변씨(草溪 卞氏)로, 사대부 집안이었으나 아버지 대에 이르러 가세가 넉넉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위로 형 이희신(李羲臣)과 이요신(李堯臣), 아래로 아우 이우신(李禹臣)이 있었습니다. 네 형제의 이름이 중국 고대의 복희·요·순·우 임금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명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순신(舜臣)의 이름 역시 순임금의 신하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형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는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돌보았다고 전합니다.

어린 시절 서울 건천동에서 자라며 훗날 영의정이 되는 류성룡(柳成龍)과 이웃해 지냈다고 전해지는데,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이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았다고 적었습니다. 이후 가족이 충청도 아산(牙山) 일대로 옮겨 가 살게 되면서 아산은 그의 평생의 고향이 되었고, 시기와 사정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설명이 조금씩 다릅니다. 훗날 원균(元均)과 같은 시대의 무인이었다는 사실도 어린 시절 인연과 함께 자주 언급되지만, 두 사람의 구체적인 어린 시절 교류는 사료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무예 입문과 무과 급제

이순신은 1565년(21세) 무관 방진(方震)의 딸과 혼인했고, 22세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무예를 익히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처가는 아산에 있었고, 부부가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아산은 그의 가정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문신 집안의 자제로서 문과 공부를 하다 늦게 무과로 방향을 틀었다는 점이 그의 이력의 특징으로 꼽힙니다.

1572년(28세) 한성의 훈련원 별과(別科) 시험에서 말을 달리다 낙마하여 다리에 부상을 입고 낙방했습니다. 부러진 다리를 버드나무 껍질로 싸매고 다시 일어나 시험을 마저 치렀다는 일화가 전해지지만, 이 부분은 후대의 기록에 의존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4년 뒤인 1576년(선조 9) 식년시 무과에서 병과 4위로 급제했습니다(32세). 연표에 따라 급제 시기가 음력 2월·3월·4월로 엇갈려 적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급제 후 첫 관직은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였고, 같은 해 12월 함경도 최북단의 동구비보(童仇非堡) 권관(權管)으로 나가면서 변방 근무가 시작되었습니다.

변방 근무와 발포 만호 시절

동구비보에서 약 3년을 근무한 뒤 1579년에는 한성으로 돌아와 훈련원 봉사를 맡았고, 곧 충청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해미(海美)에서 근무했습니다. 이 시기 병조정랑 서익(徐益)이 인사 청탁을 하자 이순신이 이를 거절하여 서익의 앙심을 샀고, 훗날 군기 점검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1580년 음력 7월에는 전라도 발포(鉢浦, 지금의 전남 고흥)의 수군만호(水軍萬戶)가 되어 처음으로 수군 직책을 맡았습니다. 이 시기의 일화로 상관이 발포 관아의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려 하자 공물(公物)이라며 거절했다는 이야기, 군기 점검에서 하급 관원이 서익의 지시로 감점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일들이 1582년의 파직과 연관된다고 보지만, 정확한 경위는 사료마다 차이가 있어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1582년 발포 만호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다시 훈련원 봉사로 복직했습니다. 청렴한 성품과 원칙을 굽히지 않는 태도가 관직 생활에서 번번이 어려움을 낳았지만, 동시에 그를 평가하는 핵심 기준이 되었다는 점은 여러 기록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바입니다.

함경도 시절 - 건원보, 녹둔도와 백의종군

1583년 음력 7월 무렵 함경도 남병사 이용(李鏞)의 군관이 되었고,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일으킨 변란 속에서 8월 건원보(乾原堡) 권관으로 나갔습니다. 그는 여진 추장 울지내(鬱只乃)를 계략으로 유인해 사로잡았다고 전해지나, 상관이 전공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합니다. 같은 해 11월 훈련원 참군으로 옮겼으며, 아버지 이정이 세상을 떠나 3년상을 치른 뒤 1586년 사복시 주부로 복직했습니다.

1586년에는 함경도 조산보(造山堡) 만호 겸 녹둔도(鹿屯島) 둔전사의가 되었습니다. 녹둔도는 두만강 하구의 섬으로 병력이 부족했고, 이순신은 북병사 이일(李鎰)에게 군사를 더 보내 달라고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587년 음력 9월 여진족이 기습하자 이순신은 이경록(李慶祿)과 함께 맞서 싸워 일부를 격퇴하고 포로를 되찾았습니다. 피해 규모는 자료마다 차이가 큽니다(조선군 십여 명 전사, 포로 100여 명 이상 등).

그러나 북병사 이일은 패전의 책임을 이순신에게 돌려 군법으로 다스리려 했고, 선조의 명으로 이순신은 장형(杖刑)을 받은 뒤 관직 없이 군대에 복무하는 백의종군(白衣從軍) 처분을 받았습니다(1587년 음력 10월 16일, 선조실록). 이것이 그의 생애 첫 백의종군입니다. 이듬해 1588년 시전부락(時錢部落) 전투에서 공을 세워 사면을 받았고, 같은 해 6월 무렵 아산 집으로 돌아가 머물렀습니다.

정읍 현감과 전라좌수사 발탁

1589년에는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의 조방장으로 발탁되었고, 비변사의 인재 추천에서 이름이 오르는 가운데 같은 해 선전관을 거쳐 음력 12월 정읍(井邑) 현감에 임명되었습니다. 그의 정읍 현감 천거에는 류성룡이 힘을 보탠 것으로 전해지며, 이 시기에는 정언신, 이산해 등 여러 대신이 그를 추천하는 데 관련되었다고 기록됩니다.

1590년에는 고사리진·만포진 첨사로 천거되었으나 사간원이 품계를 건너뛴 파격 인사라며 반대해 무산되었습니다. 1591년 음력 2월 그는 진도군수와 가리포첨사의 발령을 거쳐 정3품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이 파격적 발탁에 대해 사간원이 거듭 반대했지만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발탁의 배경으로는 일본의 침입 가능성을 의식한 조정의 수군 강화책과 류성룡의 천거가 자주 언급되나, 선조가 처음부터 전쟁을 확신하고 이순신을 지목했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부임 일자는 2월 13일 발령과 3월 8일 부임 등 자료에 따라 다르게 기록됩니다. 전라좌수영은 여수에 있었고, 순천·낙안·보성·광양·흥양의 5관(官)과 사도·방답·여도·녹도·발포의 5포(浦)를 관할했습니다.

전쟁 준비 - 거북선과 수군 훈련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전쟁 가능성에 대비해 전선과 무기, 군량을 정비했습니다. 병선을 수리하고 화포 사격을 훈련하며 성곽과 해안 방비를 점검했고, 군사들의 훈련 일정과 병기 점검을 꼼꼼히 챙겼다는 내용이 《난중일기》 임진년 기록에 나타납니다. 군량 확보를 위해 둔전(屯田)을 운영했고, 고기잡이와 소금 생산 등으로 자급 기반을 마련했다고 전해집니다.

거북선(龜船)은 이 시기에 완성된 돌격선으로, 판옥선 위에 덮개(개판)를 씌우고 함수에 용머리, 사방에 포문과 창검을 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난중일기》에는 1592년 음력 2월 8일 거북선에 쓸 돛베 29필을 받은 기록이 있고, 3월 27일 거북선에서 지자·현자 포를 쏘았다는 기록, 4월 12일 완성된 거북선에 돛을 달고 포 사격을 시험했다는 기록이 이어집니다. 다만 거북선의 정확한 구조(철갑 덮개 여부 등)는 설계도가 전하지 않아 학계에서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은 판옥선(板屋船)으로, 갑판 위에 상부 구조를 올려 노꾼과 전투 병력을 분리하고 함포를 효과적으로 쓸 수 있게 한 배였습니다. 이순신은 이러한 선박과 천자·지자·현자·황자 총통 등의 화포 우위를 살려 접근전을 피하고 원거리에서 적선을 제압하는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임진왜란 발발과 1차 출전 - 옥포·합포·적진포

1592년 음력 4월 13일(양력 5월 24일)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며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순신은 4월 15일 밤 경상우수사 원균의 통문으로 이 소식을 접했다고 전해집니다. 전라좌수영의 관할 밖이라는 점과 조정의 명령 없이 움직이기 어려운 사정 때문에 그는 며칠 동안 신중하게 대응을 가늠했고, 정운(鄭運)과 송희립(宋希立) 등 휘하 장수들의 출전 요청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전합니다.

5월 4일 새벽, 판옥선 20여 척 등 80여 척 안팎의 선단을 이끌고 첫 출전에 나선 이순신은 경상우수군과 합류해 거제도 쪽으로 향했습니다. 5월 7일 옥포(玉浦)에서 일본 선단 약 30척을 발견해 공격했고, 장계에는 26척을 격침했다고 보고되었습니다. 이어 합포(合浦)에서 5척, 이튿날 적진포(赤珍浦)에서 10여 척(11~13척으로 전함)을 격침했습니다. 조선 수군의 피해는 부상 몇 명에 그쳤다고 기록됩니다.

이 해전은 조선 수군의 첫 승리로, 육지에서 연패를 거듭하던 조정과 백성에게 중요한 소식이었습니다. 격파한 수치는 조선 측 장계를 기준으로 한 것이며 일본 측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 승리로 선조는 이순신에게 가선대부의 품계를 내렸다고 합니다.

2차 출전 - 사천·당포·당항포·율포와 거북선의 첫 실전

2차 출전은 5월 27일 시작되어, 5월 29일(음력) 사천(泗川)에서 일본 수군과 맞붙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거북선이 처음 실전에 투입되어 적진으로 돌입했고, 장계에는 일본 선박 13척이 격파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순신은 이 해전에서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는 부상을 입었으나 전투를 지휘하며 내색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6월 2일 당포(唐浦)에서는 일본 장수가 탄 큰 배를 비롯한 21척을 격파했고, 6월 4일에는 이억기(李億祺)가 이끄는 전라우수군이 합류했습니다. 6월 5일 당항포(唐項浦)에서 26척, 6월 7일 율포(栗浦)에서 일본 선박 3척을 격파하고 4척을 노획했다고 기록되며, 이 출전에서 조선 수군의 전사자는 11명 안팎으로 보고되었습니다. 이러한 숫자는 모두 조선 측 장계에 근거한 것입니다.

연이은 승리로 이순신의 품계는 자헌대부(資憲大夫)까지 올랐고, 조선 수군은 경상도 남해안의 제해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본군의 수륙 병진 계획에 심각한 차질을 안겼습니다.

한산도 대첩과 부산포 해전

1592년 음력 7월 8일(양력 8월 14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한산도 대첩이 벌어졌습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휘하의 일본 선단이 견내량(見乃梁)에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좁고 암초가 많은 견내량 안에서는 싸움이 불리하다고 보고 일부 판옥선으로 적을 유인해 넓은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냈습니다. 이후 조선 수군은 학익진(鶴翼陣)으로 적을 포위해 총통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조선 수군은 이억기, 원균의 함대와 함께 판옥선 50여 척과 거북선을 동원한 것으로 알려지며, 일본 측은 70여 척이었다고 전합니다. 장계에는 적선 47척을 격침하고 12척을 나포했다고 기록되며, 아군의 전사자는 19명으로 보고되었습니다. 7월 10일에는 안골포에서 일본 수군을 다시 공격했습니다. 정확한 수치는 사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이 해전으로 일본은 서해로 진출해 수륙 병진으로 한양과 평양을 연결하려던 보급 계획이 크게 흔들렸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전 중지를 명했다고 전합니다. 미국인 선교사이자 학자 호머 헐버트는 이 해전을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라 평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같은 해 음력 9월 1일에는 부산포(釜山浦)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이순신은 이억기, 원균과 함께 일본군의 본거지에 가까운 부산 앞바다로 진격해 100여 척의 적선을 격파했다고 보고했으나, 이 전투에서 녹도만호 정운이 전사하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는 정운을 위해 제사를 지내 애도했다고 전합니다.

삼도수군통제사와 한산도 진중 시절 (1593~1597)

1593년 음력 2월부터 5월까지 웅포(熊浦)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했으나, 일본군이 성을 쌓고 나오지 않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같은 해 7월 전라좌수영 본영을 한산도로 옮기고, 8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습니다(8월 1일 또는 15일 등 기록이 다름). 이로써 경상·전라·충청 세 도의 수군을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한산도에서는 운주당(運籌堂)이라는 집무 공간을 두고 장수들과 작전을 의논했다고 전해지며, 이곳이 훗날 제승당(制勝堂)의 기원입니다. 둔전을 경영하고 소금을 굽고 고기를 잡아 군량을 확보했으며, 1594년에는 한산도 진중에서 무과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고 전합니다. 같은 해 봄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수군에 큰 피해가 났다는 장계도 남아 있습니다.

이 시기 어머니 변씨를 전라좌수영 근처 여수 고음천으로 모셔 와 봉양했고, 《난중일기》에는 어머니를 '천지(天只)'라 부르며 안부를 살피는 대목이 자주 나옵니다. 한편 경상우수사 원균과의 갈등이 깊어졌고, 일기에는 원균을 비판하는 대목이 여러 곳 보입니다. 1595년 무렵 원균은 충청병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난중일기》와 서간·시 (국보 제76호)

《난중일기(亂中日記)》는 이순신이 1592년 음력 1월 1일부터 전사하기 이틀 전인 1598년 11월 17일까지 쓴 진중 일기입니다. 원래는 임진일기·계사일기·갑오일기·병신일기·정유일기·무술일기처럼 해당 연도 이름이 붙은 초고본이었는데, 1795년 정조의 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이를 합쳐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현재 충남 아산 현충사에는 친필 초고본 7책과 서간첩, 임진장초가 함께 보관되어 있으며,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13년 6월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임진장초(壬辰狀草)는 1592년 해전 직후 올린 장계의 초본을 모은 책입니다.

일기에는 날씨와 군무, 부하들의 사정은 물론 어머니에 대한 걱정, 아들들에 대한 마음, 꿈과 술 이야기, 고독과 괴로움이 담백하게 적혀 있습니다. 1597년 음력 4월 어머니의 부음을 들은 날의 슬픔, 같은 해 10월 14일 아들 면의 전사 소식을 들은 대목, 명량 해전 당일(9월 16일)의 긴 기록이 특히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원균을 비판하는 내용이 여러 곳에 있다는 점도 연구자들이 자주 거론합니다.

모함과 투옥 (1597)

1597년 정유재란을 앞두고 일본군 측의 계략(요시라 등이 전한 가토 기요마사 도해 정보)이 조정에 전해졌고, 조정은 이순신에게 가토 기요마사를 해상에서 요격하라고 명했습니다. 이순신은 이 정보가 적의 유인책일 수 있다고 보고 출동을 미뤘고, 이 일은 조정이 그를 질책하는 구실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원균과의 갈등 속에 올라온 비난과 부하들의 보고 논란도 겹쳤다고 합니다.

1597년 음력 2월 25일 이순신은 통제사에서 해임되어 체포되었고 원균이 후임이 되었습니다. 3월 4일 한성의 옥에 갇혔으며 심문과 고문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나 정도에 대해서는 사료의 해석이 갈립니다. 정탁 등이 이순신을 구하려는 상소를 올렸고, 선조는 4월 1일 그를 사형 대신 석방해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도록 했습니다. 옥중에 28일간 갇혀 있었습니다.

이순신이 선조에게 '역적 모의' 혐의를 받았다는 식의 서술이 대중 매체에 자주 등장하지만, 사료상 확인되는 죄목은 출동 명령 불이행과 조정을 기만했다는 것(그리고 원균의 모함) 정도로 정리됩니다. 처분 경위에 대해서는 학계 해석이 계속 논의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별세와 백의종군

출옥 후 이순신은 아산으로 향했습니다. 그의 어머니 변씨는 아들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에 아산에서 여수로 내려오던 길에 배 위에서 병을 얻어 별세했고(1597년 음력 4월 11일경), 이순신은 4월 13일 이 소식을 듣고 달려갔습니다. 《난중일기》에는 어머니의 영구를 맞는 심정과 3년상을 치르지 못하는 한탄이 길게 적혀 있습니다.

장례를 치른 뒤에는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곧바로 남쪽의 권율 도원수부(경남 합천 초계)로 내려가 백의종군에 들어갔습니다. 이 길 위에서 그는 전쟁 중 흩어진 민가와 피난민, 부하와 친지들을 만났고,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소식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한편 일기에서는 이 시기에 아들 열(蔚), 조카들과의 만남, 남은 가족 걱정이 거듭 언급됩니다.

이 시기의 아픔은 이후 명량 해전을 앞둔 결단과 곧바로 이어지는 인생의 가장 어두운 구간으로 평가됩니다.

칠천량 패전과 복귀

1597년 음력 7월 16일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사실상 궤멸했습니다.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이 전사한 것으로 전해지며,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판옥선 12척을 이끌고 빠져나와 한산도의 군수품을 불태우고 물러났다고 기록됩니다. 한산도를 중심으로 쌓아 올린 수군 기반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입니다.

패전 소식을 들은 조정은 7월 하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했습니다(음력 7월 22일 또는 23일로 전함). 이순신은 8월 3일 진주 부근에서 임명 교서를 받고 곧바로 남해안 일대를 돌며 흩어진 병사와 무기, 배를 수습했습니다.

한편 조정이 수군이 전력 열세이니 육군에 합류하라는 취지의 명을 내리자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남아 있사오니,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능히 할 수 있습니다.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하는 취지의 장계를 올렸다고 전해집니다(이충무공전서에 실린 장계 문구이며 원문 표현은 자료마다 약간 다릅니다).

명량 해전 (1597.9.16)

이순신은 8월 18일경 회령포에서 배설이 수습한 판옥선 12척을 인수했고, 이후 1척이 더 보태져 13척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8월 29일 진도 벽파진에 진을 쳤고, 9월 7일 일본군의 탐망선을 격퇴하는 등 교전을 이어가다 9월 15일 우수영으로 진을 옮겼습니다. 이날 이순신은 장수들에게 '병법에 필사즉생 필생즉사라 했다'는 취지로 말하며 결의를 다졌고, 이 내용은 《난중일기》 9월 15일 기록에 실려 있습니다.

9월 16일(양력 10월 26일) 이른 아침, 울돌목(명량)으로 일본 수군 약 133척(난중일기 기록)이 밀려들었습니다. 조선 수군의 선두에 선 이순신의 대장선이 홀로 적을 막아내는 동안 뒤의 배들이 뒤로 물러서자, 그는 김응함과 안위를 불러 독려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안위의 배 등이 가세해 싸웠고, 조류가 바뀌는 시점에 일본 선단이 좁은 물목에서 서로 얽혀 큰 손실을 입었다고 설명됩니다. 일본 수군의 지휘관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가 전사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일본 측은 전선 30여 척이 파손되었다고 하며(난중일기·선조실록 기록 기준), 조선 수군은 한 척도 잃지 않았다고 기록됩니다. 해남의 명량대첩비는 훨씬 큰 수치를 적고 있어 사료 간 차이가 큽니다. 이 승리로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이 좌절되었고, 이순신은 일기에 이를 '실로 천행(天幸)'이라 적었습니다.

그러나 승전의 기쁨 속에서도 이순신은 개인적 비극을 겪었습니다. 10월 14일 그는 막내아들 면(葂)이 아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일기에 이 슬픔을 길게 적었습니다. 면은 21세 전후였다고 전해집니다.

고금도 통제영과 조명 연합 수군

명량 해전 후 이순신은 서해안을 따라 북상했다가 1597년 음력 10월 말 목포 앞 보화도에 진을 쳤고, 이듬해 1598년 2월 고금도(古今島)로 진을 옮겨 수군을 재건했습니다. 고금도는 곡창지대에 가깝고 섬의 지형이 방어에 유리하여, 피난민이 모여들어 군량을 보충하는 근거지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해로통행첩을 발급해 통행세를 받는 방식으로 군량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598년 음력 7월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이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고금도에 도착해 조명 연합 수군이 꾸려졌습니다. 진린은 거만하고 성미가 거칠다는 평이 있었으나, 이순신이 후하게 대접하고 전공을 양보하는 태도를 보여 신뢰를 얻었다고 전합니다. 이후 진린은 이순신을 존경해 '노야(老爺)'로 불렀다는 일화가 전해지지만 구체적인 표현은 자료마다 다릅니다.

한편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9월에는 육군과 조명 수군이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를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노량 해전과 전사 (1598.11.19)

철수하는 일본군 가운데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려는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대함대가 노량 해협을 지나려 한다는 정보를 얻은 이순신은 11월 18일 밤 진린의 명 수군과 함께 출전했습니다. 조선 수군은 관음포 쪽에 매복해 있다가 19일 새벽 일본 선단이 노량에 들어서자 공격했고, 약 8시간 가까이 계속된 격전 끝에 일본 전선 다수가 침몰하거나 파손되었습니다. 일본 선단의 규모와 피해 수치는 사료마다 크게 다릅니다.

전투 막바지에 이순신은 관음포(觀音浦) 쪽으로 도주하는 일본 군선을 추격하던 중 날아온 탄환에 가슴 쪽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그는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고 유언했다고 전해지며, 곁에 있던 아들 회(薈)와 조카 이완(李莞)이 이를 숨기고 싸움을 이어 가게 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일화는 《징비록》과 후대 행록에 실려 있으나 세부 표현은 기록마다 약간 다릅니다.

전투 과정에서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등 조선 장수들과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鄧子龍)도 전사했습니다. 진린은 이순신의 죽음을 알고 통곡했다고 전하며, 남해안의 백성들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합니다. 마지막 일기는 전사 이틀 전인 11월 17일에 쓰였습니다.

장례와 묘소, 시호 충무

이순신의 시신은 고금도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남해를 거쳐 고향 충청도 아산으로 옮겨졌습니다. 장례는 이듬해 1599년 음력 2월 11일 아산 금성산(현재 아산 일대)에 안장되었다고 전해지며, 이 일정은 법도에 따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1614년(광해군 6) 묘는 현재의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於羅山)으로 이장되었고, 현재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는 사적 제112호입니다.

사후 추증은 여러 차례 이어졌습니다. 1598년 12월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며 덕풍부원군에 봉해지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1643년(인조 21) 시호 '충무(忠武)'가 내려졌고, 1793년(정조 17)에는 영의정이 더해졌습니다. 정조는 1794년 직접 신도비의 비문을 지어 내렸다고 합니다.

시호 '충무(忠武)'는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임금을 섬겼다는 뜻의 충(忠)과 재난을 평정한 무공을 기리는 무(武)를 결합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795년 정조의 명으로 유득공 등이 《이충무공전서》 14권 8책을 편찬하여 그의 장계, 일기, 행록 등을 정리했습니다.

가족과 후손

이순신은 무관 방진(方震)의 딸인 방씨 부인(상주 또는 온양 방씨로 전함)과 혼인했고, 장남 이회(李薈), 차남 이열(李蔚, 훗날 이름이 '울'로도 표기), 3남 이면(李葂), 딸 한 명을 두었습니다. 측실 소생으로는 이훈(李薰)·이신(李荵)과 딸 두 명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자녀의 이름 표기와 순서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이회는 1598년 노량 해전에서 아버지의 곁을 지켰고, 《난중일기》에는 이열이 백의종군 중의 아버지를 찾아와 만나는 대목이 나옵니다. 막내 이면은 1597년 아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이순신은 형들이 일찍 세상을 떠난 조카들도 함께 거두어 키웠는데, 이 중 이완(李莞) 등은 후일 무관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후손은 덕수 이씨 충무공파로 이어져, 아산 현충사 경내의 이순신 고택(옛 방진의 집으로 전해짐)을 중심으로 문중의 활동이 이어져 왔습니다. 덕수 이씨는 시조 이돈수(李敦守)에서 시작되며, 이순신은 그 후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평가와 기억 - 현충사·제승당·충렬사·동상

이순신의 사후 평가는 당대부터 높았습니다. 선조실록의 사관 논평은 칠천량 패전의 책임을 원균을 기용한 조정에 돌렸고,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그의 재능과 불운을 애석해했습니다. 정조는 《이충무공전서》 편찬을 주도하며 그를 극찬했습니다. 현대 한국에서는 갤럽 조사 등에서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여러 차례 꼽혔습니다.

그를 기리는 공간으로 아산 현충사(1706년 사당 건립, 1707년 현충사 사액), 여수 충민사(1601년 창건), 통영 충렬사(1606년 창건), 한산도 제승당, 해남 우수영의 명량대첩비(1688년 건립) 등이 있습니다. 현충사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 모금운동으로 중건되었고, 1960년대 말 대규모 성역화가 이루어졌습니다. 1968년 서울 세종로에는 청동 이순신 장군상이 세워졌습니다(현대 조형물이며, 이 동상이 그의 실제 모습을 재현한 것은 아닙니다).

국외에서는 영국 해군 제독 조지 앨릭잰더 밸러드가 1921년 저서에서 그를 넬슨에 견줄 만하다고 평했다고 전해지고, 일본의 해군 학자 사토 데쓰타로 등도 높게 평가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반면 도고 헤이하치로가 그를 존경했다는 흔한 이야기는 출처가 불확실하여 정설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의 초상으로는 1953년 장우성이 그리고 1973년 정부표준영정으로 지정된 영정이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으나, 이 영정은 복식 고증 문제와 작가를 둘러싼 논란 속에서 지정 해제 여부가 논의되어 왔습니다. 당대에 그려진 실제 초상은 전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담과 어록

이순신의 것으로 전해지는 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必死則生 必生則死(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 하면 죽는다)'로, 《난중일기》 1597년 9월 15일자에 병법의 말씀으로 적혀 있습니다. 또 '今臣戰船 尙有十二(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는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 문구로 전해지나, 정확한 표현은 자료마다 약간 다릅니다.

'戰方急 愼勿言我死(싸움이 급하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노량 해전에서 쓰러지며 남긴 유언으로 전해집니다. 흔히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식으로 줄여 인용되지만, 원문은 군사들의 동요를 막으려는 뜻입니다. 또 장검에 새겨졌다고 전하는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빛을 바꾸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인다)' 명문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밖에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로 시작하는 시조 〈한산도가〉도 이순신의 작품으로 전해지지만, 작자와 형식에 대해서는 학계에 이견이 있습니다. 명량에서 12척이 13척이 되었다는 숫자, 거북선의 구조, 한산도 대첩의 전과 같은 세부는 모두 사료마다 차이가 있어, 대중 서사에 널리 퍼진 일화는 사료와 함께 구별해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순신은 군영에서도 활쏘기를 즐기고 술과 시를 좋아했다고 일기에 나오며, 병사들의 사정을 살피고 부하들과 함께 활을 쏘며 소통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순신은 또한 노비와 가난한 군사, 피난민의 처지에 마음을 쓴 인물로 평가되며, 이러한 면모가 그에 대한 존경의 바탕으로 거론됩니다.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 사적 제112호)

후손

방씨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이회(李薈)·이열(李蔚)·이면(李葂)과 딸을 두었다. 후손은 덕수 이씨 충무공파로 이어졌으며, 아산 현충사 인근 이순신 고택을 중심으로 문중이 이어져 왔다.

관련 사진

국보 제76호 《난중일기 및 서간첩·임진장초》 중 임진장초(壬辰狀草) 표지와 본문 · 퍼블릭 도메인 · Wikimedia Commons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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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항의 거북선 복원 모형 · CC BY-SA 3.0 · Junho Jung · Wikimedia Commons (실물 도면이 남아있지 않아 후대 고증을 바탕으로 한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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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제승당(制勝堂) — 한산도 진중 운주당 터에 세운 이순신 기념 사당 · CC BY-SA 3.0 · Asfreeas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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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현충사(顯忠祠) 본전 · CC BY-SA 2.0 · Joongi Kim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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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 소장 이순신 장검(長劍, 1594년 제작) · CC0 · 국립 현충사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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