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서씨(扶餘 徐氏) — 충남 부여를 본관으로 하며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시조로 받드는 서씨의 한 갈래로, 조선 시대 병조판서 서필원과 의주목사 서익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충남 부여를 본관으로 하며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시조로 받드는 서씨의 한 갈래로, 조선 시대 병조판서 서필원과 의주목사 서익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부여 서씨 인구는 약 17,145명으로 집계되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씨·본관 가운데 하나입니다. 같은 서씨라도 본관(부여)이 다르면 계통이 다른 집안입니다. 본관·파·항렬의 뜻이 궁금하다면 본관·파·항렬 정리 가이드를 참고하세요.
부여 서씨(扶餘 徐氏)는 충청남도 부여군을 본관으로 하는 서씨의 한 갈래입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17,145명으로 집계되었고, 서씨 가운데 이천 서씨나 달성 서씨, 대구 서씨에 비하면 작은 규모의 본관입니다. 시조는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의 아들로 전하는 태자 부여융(扶餘隆)이고, 원시조는 백제를 세운 온조왕이라고 족보는 설명합니다.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하자 의자왕과 왕족, 대신, 주민 1만여 명이 낙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족보는 이때 당 고종이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의 품계를 내리고 아들 부여융에게 서씨 성을 하사해 본국으로 돌려보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이 사성 이야기는 1760년 대동보에 나타나는 전승이며, 학계에서는 중국 사서에 성을 바꾸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출토된 묘지석에 부여 성이 그대로 쓰여 있다는 설명도 있고, 반대로 나라가 망한 뒤 신분을 숨기려 성을 바꾸었을 가능성을 신빙성 있게 보는 시각도 있어 자료가 갈립니다. 부여융 자신은 당나라 웅진도독으로 백제 유민을 다스린 인물로, 평가도 엇갈립니다.
부여융 이후의 세계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족보는 서융의 원손으로 고려 때 병부상서를 지내고 태원군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어 부여를 본관으로 삼고 세계를 이어 왔습니다. 서존의 11대손은 서수손(徐秀孫)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부여융과 서존 사이의 몇 세대는 기록으로 이어지지 않은 상태이며, 이는 다른 서씨 본관의 시조 전승과도 비슷한 한계입니다.
서씨는 이천·달성·대구·장성·연산·남평·부여·평당·남양·당성 등 여러 관향으로 나뉜다고 대구 서씨 족보의 서문은 전합니다. 1763년 이천 서씨 계미보는 부여조를 온조왕으로 본다고 적었으나, 현재 위키백과는 부여 서씨와 이천 서씨의 연관성이 이미 부정되었고 본관이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영문 위키백과에서 부여 서씨를 이천 서씨 아래 분적으로 분류하는 자료도 있어 설명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천 서씨·대구 서씨·달성 서씨 문서와 견주어 보세요.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는 4명으로 기록된다고 합니다. 선조 때 서익(1542~1587)은 13세에 향시에서 장원하고 1569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의주목사를 지냈으며, 1585년 정여립을 비판하고 이이·정철·박순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동인의 탄핵을 받아 물러났습니다. 『만죽헌집』과 시조 2수를 남겼고, 논산 가야곡면 육곡리 행림서원에 모셔졌습니다. 그의 증손 서필원(1614~1671)은 대동법을 지지한 전라감사를 거쳐 병조판서에 올랐고 직언으로 '오직'이라 불렸습니다. 서필원은 충청도관찰사 때 서원의 폐단 개혁을 건의했고 함경도관찰사 때는 목면 재배를 권장하며 육진혁막제조를 올렸다고 전하며, 서익의 시조 2수는 『청구영언』 등에 실리고 장검과 옥피리가 유품으로 전해진다고 합니다. 한편 서익의 서자로 전하는 서양갑은 강변칠우의 한 사람으로, 조령에서 은상인을 살해하다 체포된 뒤 대북파의 회유로 한 허위 진술이 1613년 계축옥사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현대에는 사법시험 1회 수석으로 대법관을 지낸 서성(1942~), 제24대 산림청장 서승진(1953~)이 위키백과에 부여 서씨로 소개됩니다. 위키백과의 인물 목록에는 이 밖에도 서호갑(이조참의), 서명원(이조참판), 서한범(국악 교수), 서정식(소방감) 등이 올라 있으나, 이번에는 개별 자료로 본관을 교차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위키백과에는 현존 연예인도 부여 서씨로 소개되어 있으나, 사적 정보 보호를 위해 이번 목록에는 넣지 않았습니다.
파 이름과 파조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파(계파) 구분은 문중·족보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우리 집안 파는 족보에서 확인하세요.
부여융(시조로 전하는 백제 왕자·웅진도독), 서익(의주목사·『만죽헌집』), 서필원(병조판서·대동법 지지), 서양갑(강변칠우의 서얼 문인), 서성(사법시험 1회 수석·대법관), 서승진(제24대 산림청장)
이름을 누르면 인물 상세(생몰·약력·묘소·후손)를 볼 수 있습니다.
집성촌으로는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삼전리, 강청리, 가늠작골, 두월리 일대에 부여 서씨 재실이 있고 육곡리에는 서익을 모신 행림서원이 있습니다),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가 소개되며, 평안남도 개천군도 언급됩니다. 부여 서씨 문중은 부여가 본관이지만 실제 세거는 논산 지역 중심이라는 점이 특징입니다. 서익의 서원 배향 과정에서 갈산서원, 산노리 효암서원, 육곡리 행림서원으로 옮겨진 사실도 논산 지역과의 연고를 보여 줍니다.
부여 서씨의 시조 전승은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 곧 지금의 부여와 이어집니다. 부소산성 낙화암, 정림사지 오층석탑 같은 백제 후기의 유적은 부여융과 직접 관련된 유적은 아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의 배경을 보여 줍니다. 아래 사진은 모두 인물 사진이 아니라 부여의 백제 유적입니다.
이번 초안에서는 부여 서씨의 파(분파) 이름과 파조, 종친회의 공식 이름과 연락처, 항렬 정보를 믿을 만한 자료로 확인하지 못해 적지 않았습니다. 인구 17,145명은 2015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른 값으로 소개됩니다. 서존 이후의 세계와 중시조는 족보와 종친회 자료로 보완해야 합니다.
서씨는 본관이 많아 인물이 섞여 소개되는 일이 잦습니다. 같은 서익이라는 이름도 있고, 서성은 대구 서씨 서성과 부여 서씨 서성이 따로 있습니다. 화담 서경덕은 당성 서씨이며 부여 서씨가 아닙니다. 또 이천 서씨의 서희·서필처럼 이름이 비슷해 보이는 고려의 명문 인물과 조선의 서필원(부여 서씨)을 혼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여 서씨라고 소개된 인물이라도 위키백과 인물 문서의 분류와 족보로 본관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번 초안의 인물은 모두 위키백과 개별 문서에서 본관이 부여로 표시된 사람입니다(부여융은 시조로 전하는 인물).





부여 서씨 종친회 홈페이지는 한국전자족보도서관 종친회 목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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