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목사를 지낸 문신으로 시문에 뛰어난 호 만죽, 『만죽헌집』 저자
| 생몰 | 1542 ~ 1587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부여 서씨 |
서익(徐益, 1542~158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부여, 자는 군수(君受), 호는 만죽(萬竹)·만죽헌입니다. 아버지는 진사 서진남, 어머니는 직제학 이약해의 딸 광주 이씨이며, 조부는 서관입니다. 지금의 논산 가야곡면 일대에 연고가 있는 문중 출신으로 소개됩니다.
1554년 13세에 향시에서 장원했고, 1564년 생원시에 합격한 뒤 1569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습니다. 예조·병조·이조좌랑, 병조정랑, 교리, 수찬, 군기경차관, 종부시첨정, 함경북도 순문관, 사인을 지냈고, 외직으로 고창현감·안동부사·평양서윤·서천군수·의주목사를 맡았습니다. 이이의 영향을 받아 육조방략으로 북방을 선무했다고 전합니다.
문장과 도덕, 기절이 뛰어나 삼당시인·팔문장·이십팔숙회 등으로 불렸고, 이이와 정철에게서 뜻이 통하는 벗으로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1585년 의주목사로 있으면서 정여립을 비판하고 정여립에게 탄핵받은 이이와 정철, 박순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동인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부인은 장수 황씨 황정수의 딸이며, 아들 서용갑과 손자 서운기가 있고 서자로 서양갑이 전합니다. 저서로 『만죽헌집』 1권과 시조 2수가 있으며, 시조는 『청구영언』 등에 실려 있다고 합니다. 유품으로 장검 한 점과 옥피리 한 점이 전해집니다.
13세에 향시에서 장원했을 만큼 일찍부터 문재가 알려졌습니다. 외조부는 직제학 이약해이고 아내는 장수 황씨였습니다.
안동부사와 서천군수, 의주목사 등 외직과 홍문관·육조의 내직을 오갔습니다. 문장과 기절이 뛰어나 당대 문사들과 함께 이십팔숙회에 이름이 오르내렸다고 합니다.
의주목사 때 이이, 정철, 박순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동인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내놓았습니다. 이 일로 그는 서인 계열의 인물로 기억됩니다.
행림서원 배향에는 송시열의 주청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증손 서필원은 병조판서를 지냈고, 서자 서양갑은 계축옥사에서 허위 진술로 이름이 알려집니다.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의 행림서원에 모셔져 있습니다. 처음 은진의 갈산서원에 배향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불타 송시열의 주청으로 산노리 효암서원에 배향되었고, 위차 문제로 다시 행림서원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이·정철을 변호한 선조 때 부여 서씨 문신으로 호는 만죽, 의주목사를 지냈습니다.
『만죽헌집』 1권과 시조 2수가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