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때 18년간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 청백리, 호 방촌, 시호 익성

| 생몰 | 1363 ~ 1452 |
| 시대 | 조선 초기 |
| 본관 | 장수 황씨 |
황희(1363~1452)는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 태종·세종 때 활약한 문신으로 본관은 장수입니다. 초명은 수로, 자는 구부, 호는 방촌, 시호는 익성입니다. 고려 말 음서로 벼슬길에 올랐다가 조선 건국 뒤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고 전합니다.
형조·예조·이조·병조 판서와 대사헌, 강원도관찰사 등을 거쳐 1426년 우의정에 올랐고, 1431년 영의정부사가 되어 1449년 87세로 물러날 때까지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정승 자리에만 24년을 있었다고 전하며, 청백리로 이름이 높습니다.
아들로 황치신·황보신·황수신·황직신이 전하며, 이 가운데 황수신은 아버지에 이어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황희는 청렴하고 너그러운 재상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밭 가는 농부에게 두 마리 소 중 어느 쪽이 나은지 물었더니 농부가 귓속말로 답하며 "짐승도 흉을 들으면 기분이 상한다"고 했고, 이에 크게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또 방탕하게 지내던 아들 황수신을 꾸짖는 대신 손님처럼 관복을 갖추고 맞아 뉘우치게 했다는 이야기, 두 여종의 다툼에 양쪽이 다 옳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다만 이런 일화는 후대 야사와 문집을 통해 전해진 전승이며, 실록에서 그대로 확인되는 사실은 아닙니다. 세종이 허름한 집에서 보리밥과 된장으로 소박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았다는 이야기 역시 청빈의 상징으로 전하는 일화입니다.
태종 때 두각을 나타냈으나 1418년 무렵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에 반대하다 파직되어 교하와 남원 등에 머물렀다고 전합니다. 세종 즉위 뒤 다시 등용되어 1426년 우의정, 1431년 영의정부사에 올랐고, 1449년 87세로 물러날 때까지 영의정으로서 세종의 정치를 보좌했습니다. 영의정 재임 약 18년은 세종 대 가장 긴 기간이었다고 전합니다.
1423년에는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흉년에 백성을 구휼했다고 하며, 은퇴 뒤에도 국가의 큰일에는 자문을 맡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경기도 파주 문산읍 사목리에는 말년에 머물렀다고 전하는 정자 반구정이 있고, 1452년 별세 뒤 유덕을 기려 세운 방촌영당과 제사를 지내는 경모재, 방촌황희기념관이 이어져 있습니다. 묘소는 탄현면 금승리에 있습니다. 상주의 옥동서원과 장수의 창계서원에서도 모셔집니다.
아들 대에서 호안공(황치신)·열성공(황수신) 등의 파로 나뉘어 이어졌으며, 장수 황씨의 대표 인물로 기려집니다. 아들 황치신, 황보신, 황수신, 황직신의 이야기는 각 문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후 1452년 세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1455년 순충보조공신에 책록되어 남원부원군에 추봉되었다고 전합니다. 후대에는 원만하고 청렴한 재상, 청백리의 상징으로 높이 평가됩니다.
한편 일부 연구와 기록은 뇌물·청탁 논란, 사위의 살인 사건 은폐 의혹, 친인척 문제 등을 지적하며, 청빈 이미지가 후대에 미화·신격화된 면이 있다고도 봅니다. 따라서 황희는 높은 평가와 비판이 함께 전해지는 인물로 이해하는 것이 균형에 맞습니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황희선생묘, 경기도 기념물 제34호)
초배 최씨와 계배 청주 양씨 사이에 아들 황치신(호안공)·황보신·황수신(열성공)·황직신을 두었다고 전합니다. 장남 황치신은 판중추부사, 셋째 황수신은 영의정에 올랐고, 후손은 아들 대에서 호안공파·소윤공파·열성공파 등으로 갈라졌다고 전합니다. 후손 가운데에는 통신사 황윤길, 《매천야록》의 황현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본관 장수 황씨 문서도 함께 보세요.
조선 초 태종·세종 때 활약한 문신으로, 1431년부터 1449년까지 약 18년간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입니다. 청렴한 청백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황치신, 황보신, 황수신, 황직신이 전합니다. 이 가운데 황수신은 세조 때 영의정에 올라 부자가 영의정을 지냈습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에 있고, 파주 문산읍에 반구정과 방촌영당·방촌황희기념관이 있습니다.
장수 황씨입니다. 장수 황씨는 황희 대에 크게 번성했다고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