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4대 왕, 훈민정음을 창제한 임금

| 생몰 | 1397 ~ 1450 |
| 시대 | 조선 전기 |
| 본관 | 전주 이씨 |
세종대왕(1397~1450)은 조선의 제4대 왕으로,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418년 즉위해 1450년까지 약 32년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이름은 도(祹), 처음 봉호는 충녕대군이며 본관은 전주 이씨입니다.
1443년 훈민정음을 만들어 1446년 반포했고, 집현전을 통해 학문과 편찬 사업을 이끌었으며 장영실 등과 함께 측우기·자격루·앙부일구 같은 과학 기구를 발전시켰습니다. 4군 6진을 개척해 북쪽 국경의 기틀을 닦고 공법 등 제도 개혁에도 힘썼습니다.
1450년 세상을 떠나 경기도 여주 영릉에 소헌왕후와 합장되었습니다. 아래에서 출생부터 즉위, 훈민정음, 과학, 국방, 제도, 가족, 평가까지 자세히 정리했습니다.
세종은 1397년 5월 15일(음력 태조 6년 4월 10일) 한성부 준수방(지금의 서울 종로구 일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훗날 조선 제3대 왕이 되는 태종 이방원,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씨이며, 태종의 셋째 아들입니다.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 아명은 막동으로 전해집니다. 이름 글자는 실록 총서에 따라 표기하나, 자료에 따라 글자 형태가 다르게 적히기도 합니다.
할아버지는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입니다. 본관은 전주 이씨이며, 태어난 해는 아버지 이방원이 아직 왕자의 신분으로 태조의 곁에 있던 때였습니다. 외가인 여흥 민씨 집안은 태종의 즉위 과정에 크게 기여했으나, 훗날 태종은 외척의 힘을 경계해 민무구·민무질 형제 등을 제거하였습니다.
1407년(태종 7) 충녕군에 봉해졌고 1408년 심온의 딸(훗날 소헌왕후)과 혼인했으며, 1412년 충녕대군이 되었습니다. 형으로는 세자 양녕대군, 둘째 효령대군이 있었고, 동생으로 성녕대군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몹시 좋아해 병중에도 책을 놓지 않아 아버지가 책을 거두어 갔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은 1404년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행실 문제로 부왕과 갈등을 빚었고 1418년 6월(음력) 세자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어 태종은 대신들과 논의한 끝에 셋째 충녕대군을 새 세자로 삼았습니다(양력 1418년 7월 15일). 후대에는 양녕이 스스로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으나, 최근에는 충녕 본인의 준비와 태종의 판단을 함께 보는 견해도 있어, 당시 사정은 사료에 따라 해석이 갈립니다.
세자가 된 지 두 달 남짓 만인 1418년 8월 10일(음력, 양력 9월 18일) 태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했습니다. 이때 나이는 만 21세였습니다. 즉위 후 연호는 명나라의 영락·선덕을 따랐고, 묘호는 세종, 훗날 시호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으로 올려졌습니다.
즉위 후에도 태종은 상왕으로서 군사권과 주요 인사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1418년 말에는 세종의 장인 심온이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뒤 군권 장악 혐의로 몰려 사사되었다고 전해지며, 이는 외척의 힘을 미리 누르려는 태종의 조치로 해석됩니다. 태종이 1422년 세상을 떠난 뒤에야 세종은 온전한 친정을 시작했습니다.
세종은 황희·맹사성·허조 등 경험 많은 재상과 젊은 학자들을 함께 중용했습니다. 1420년 궁중의 집현전을 정비해 학사들이 연구와 편찬에 전념하도록 했고, 이후 정인지·신숙주·성삼문·박팽년 등이 이곳을 거쳤습니다. 신하와 토론하며 국정을 이끈 점이 이 시기 정치의 특징으로 꼽힙니다.
세종은 1443년(세종 25) 12월 새 글자 훈민정음을 만들었고, 1446년 9월에 이를 반포했습니다. 글자 수 28자로 알려진 이 문자는 발음 기관의 모양과 하늘·땅·사람의 모양을 본떠 만든 과학적 체계로 평가받습니다. 반포일 가운데 정확한 날짜는 전해지지 않으며, 해례본 말미의 기록을 바탕으로 '9월 상순'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창제 과정에서 세종이 중심 역할을 했다는 점은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집현전 학사나 왕자·공주가 어느 정도 참여했는지는 사료가 부족해 견해가 갈립니다. 1444년 2월에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중국 문명 질서와 한자 문화를 이유로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하루 이틀 갇혔다 풀려났다고 전해집니다.
반포와 함께 정인지·신숙주·성삼문 등이 설명서 《훈민정음 해례본》(해례와 정인지 서문 포함)을 펴냈습니다. 이 책은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어 간송 전형필이 소장했고, 1962년 국보 제70호,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후 《용비어천가》·《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 등 훈민정음으로 쓴 책이 이어졌고, 하급 관리 시험에도 쓰였습니다.
세종 때에는 천문·역법·기계 분야가 크게 발전했습니다. 노비 출신으로 궁중 기술자가 된 장영실이 이천·정초 등과 함께 혼천의·간의,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 등을 제작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앙부일구와 자격루는 1434년경 만들어졌고, 1438년에는 흠경각의 옥루가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1441년에는 세자(훗날 문종)의 제안 등으로 측우기가 만들어져 각 지방 관청에 설치되었다고 하는데, 발명자와 시기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설명이 다릅니다. 이순지·김담 등이 한양을 기준으로 하는 역법서 《칠정산》 내편·외편(1442년)을 편찬했고, 1429년에는 정초·변효문이 우리 풍토에 맞는 농사법을 정리한 《농사직설》을 펴냈습니다.
인쇄술에서는 1420년 경자자, 1434년 갑인자 등 금속활자를 개량해 대량 출판이 가능해졌고, 국방 기술로는 화포·총통과 신기전 개량이 이루어졌습니다. 장영실은 1442년 임금의 가마가 부서진 책임을 지고 처벌되어 이후의 행적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세종은 음악을 예법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보고, 박연에게 아악을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1430년경 편경을 새로 만들어 음률을 바로잡았고, 소리의 길이와 높낮이를 기록하는 정간보를 만들었으며, 직접 지은 「여민락」 등이 전해집니다.
편찬 사업도 활발했습니다. 《삼강행실도》(1432)는 충·효·열의 사례를 그림과 글로 엮어 백성을 교화하려는 책이며, 《향약집성방》(1433)과 《의방유취》(1445)는 의학을 정리한 책입니다. 《용비어천가》(1445년 완성, 1447년 간행)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노래한 서사시이며, 이 밖에 《고려사》, 《팔도지리지》, 《총통등록》, 《국조오례의》 등도 이 시기에 편찬되거나 시작되었습니다. 세종은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석보상절》에 이어 부처의 공덕을 기린 《월인천강지곡》도 지었다고 합니다.
1419년(세종 1) 음력 6월, 상왕 태종의 뜻에 따라 이종무가 병선 200여 척을 이끌고 왜구의 근거지로 여겨지던 대마도를 정벌했습니다. 대마도주가 항복하며 일단락되었고, 이후 1426년 삼포를 열고 1443년 계해약조로 제한적인 무역을 허락하는 등 회유책을 병행했습니다. 전과와 피해 규모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북쪽에서는 여진과의 충돌을 거쳐 영토를 압록강·두만강 선으로 넓혔습니다. 1433년 최윤덕이 파저강의 야인을 쳐 압록강 상류에 4군(여연·자성·무창·우예)을 설치했고, 김종서는 1430년대 중반부터 두만강 유역에 6진(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을 세워 갔습니다. 학계에서는 4군 설치 시점과 6진 완성 시기를 1433~1449년 사이로 보며 세부 연도는 자료에 따라 다릅니다. 이 일로 오늘날 한반도의 북쪽 경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고 평가됩니다.
세종은 토지 세금 제도를 개혁해 1444년 공법(貢法)을 확정했습니다.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6등급(전분 6등법)으로 나누고, 해마다 풍흉에 따라 9등급(연분 9등법)으로 세액을 정하는 방식으로, 1430년 시작한 여론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오랜 논의 끝에 시행했다고 전해집니다.
정치 구조에서는 1436년경 의정부서사제를 시행해 육조가 의정부를 거쳐 왕에게 보고하게 함으로써 재상의 역할을 키웠다고 하지만, 시행 시기와 범위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설명이 다릅니다. 사법 면에서는 사형 사건에 세 차례 재판을 두는 금부삼복법이 실시되었고, 노비도 사람임을 고려해 부당한 형벌을 줄이려는 조치가 이어졌습니다.
관비(여종)가 아이를 낳을 때의 출산 휴가를 1426년에 100일로 늘렸고, 1434년에는 남편에게도 30일의 휴가를 주었다고 전해집니다. 흉년에는 임금의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지방에서 올리는 진상을 줄이기도 했습니다.
왕비 소헌왕후 심씨(1395~1446)는 영의정을 지낸 심온의 딸로, 8남 2녀를 낳았습니다. 장남 문종(향), 차남 세조(수양대군 유), 안평대군(용), 금성대군(유), 정소공주·정의공주 등이 그 자녀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헌왕후는 아버지 심온이 사사된 뒤에도 왕비 자리를 지켰으며 144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후궁으로는 신빈 김씨, 혜빈 양씨, 영빈 강씨 등이 있으며 그들 소생 가운데 광평대군·평원대군·영응대군 등이 있는 것으로 정리됩니다. 자녀 수는 18남 4녀 등으로 자료마다 다르게 적혀 있어 정확한 수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훗날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로 즉위했고, 이 과정에서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이 희생되었습니다. 세종이 쌓은 집현전의 학사들 가운데 일부도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해 처형되는 등, 말년에 닥칠 가족과 신하들의 비극이 후대 평가의 한 대목으로 이야기됩니다.
세종은 말년에 시력 저하와 여러 질병에 시달렸다고 전해지며, 1442년(또는 1445년경)부터 세자 문종에게 정무를 맡기는 대리청정을 시켰습니다. 1446년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건강이 더 나빠졌다고 합니다.
1450년 2월 17일(음력, 양력 3월 30일) 영응대군의 집(동별궁)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53세(만 52세)였고, 재위 기간은 약 31년 반이었습니다. 묘호는 세종이며, 그의 시대를 능호를 따 '영묘조'라고도 부릅니다.
능은 영릉(英陵)으로, 처음에는 서울 헌릉 서쪽에 조성되었습니다. 이후 1469년(예종 1) 풍수상의 이유 등으로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세종대왕릉)으로 옮겨 소헌왕후와 합장되었습니다. 현재는 효종의 능과 함께 영녕릉으로 불립니다. 여주 이장의 구체적 사유는 기록마다 설명이 다릅니다.
세종은 조선 왕 가운데 대표적인 성군으로 꼽히며, 한국에서 '대왕'이라는 존칭을 받은 소수의 군주 중 하나입니다.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해 과학·음악·법제·국방 전반에서 이룬 성과가 높이 평가되며, 현재 대한민국 1만 원권 지폐에도 그의 초상이 쓰이고 있습니다. 한편 외교·대외 정책이나 신분제, 말년 불교 귀의 등을 둘러싼 비판적 시각도 존재합니다.
일화로는 병중에도 책을 거듭 읽어 아버지가 책을 치워 버렸다는 이야기, 신하의 의견을 끝까지 경청하는 태도, 백성이 겪는 형벌의 억울함을 줄이려 한 노력 등이 전해집니다. 재위 중 노비 출신 장영실을 발탁한 일도 신분을 넘어 인재를 쓴 사례로 자주 거론됩니다.
오늘날 세종의 초상으로 널리 알려진 그림은 1973년 김기창이 그린 표준영정 등 후대에 그려진 상상화이며, 세종 당시에 그려진 어진은 전하지 않습니다. 생일(음력 4월 10일)을 기려 5월 15일은 한국에서 스승의 날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英陵, 세종대왕릉)
소헌왕후 심씨 소생의 문종·세조(수양대군)·안평대군·금성대군 등을 비롯해 후궁 소생까지 많은 자녀를 두었습니다. 문종의 아들 단종, 세조의 후손으로 이어지는 조선 왕실과 전주 이씨 종친이 그의 후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