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 李成桂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 고려 말의 명장

이성계 초상
사진: 퍼블릭 도메인 (조선 태조 어진, 작자 미상 옛 회화) · Wikimedia Commons
생몰1335 ~ 1408
시대고려 말~조선 초
본관전주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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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약력

이성계(1335~1408)는 고려 말 함경도 쌍성 지방을 기반으로 성장한 무장으로, 홍건적·왜구·여진·원나라 세력과 싸우며 명성을 얻었습니다. 1380년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친 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388년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위화도 회군) 정권을 장악했고, 정도전·조준 등 신진사대부와 손잡고 과전법 등 개혁을 추진한 끝에 1392년 공양왕에게서 왕위를 넘겨받아 조선을 세웠습니다. 즉위 후 이름을 단(旦)으로 고쳤고 묘호는 태조입니다.

1393년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1394년 한양으로 도읍을 옮겨 새 왕조의 틀을 마련했으나,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을 겪고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1408년 세상을 떠나 구리 동구릉 건원릉에 모셔졌으며, 아래에서 가문·무공·건국 과정·가족·평가를 자세히 정리했습니다.

출생과 가문

이성계는 1335년 음력 10월 11일(양력 11월 4일) 동북면 화령(지금의 함경남도 금야·영흥 일대)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아버지는 환조(桓祖) 이자춘, 어머니는 의혜왕후 최씨입니다. 본관은 전주로, 훗날 조선 왕실은 전주를 시조의 고향(풍패지향)으로 삼았습니다.

선대 계보는 목조 이안사 → 익조 이행리 → 도조 이춘 → 환조 이자춘 → 이성계로 이어집니다. 이안사는 13세기 중엽 전주에서 동북 지방으로 옮겨 가 원나라의 천호장·다루가치 직책을 맡았고, 후손들이 이를 이어받아 함경도 일대의 토착 세력으로 자랐다고 합니다. 이주 당시 따라간 인원 수 등 세부 내용은 조선 시대 기록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이자춘이 고려 편에 서서 호응하였고, 이로써 이 지역은 고려 영토로 돌아왔습니다. 이자춘은 동북면의 군사 책임을 맡았다가 1361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성계가 그 군사적 기반을 이어받았습니다.

무장으로서의 활약

이성계는 고려 말 외침이 잦던 시기에 여러 전투를 치르며 이름을 높였습니다.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그가 거느린 사병 조직 가별초는 이후 정치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다만 일부 전투는 최영 등 다른 장수의 공으로 서술된 기록도 있어, 조선 시대에 편찬된 사료에서 이성계의 공이 부각되었을 가능성도 학계에서 언급됩니다.

위화도 회군(1388)과 권력 장악

1388년 명이 철령 이북 땅의 귀속을 요구하자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다는 점, 여름철 농사철의 출병, 왜구가 빈틈을 노릴 수 있다는 점, 장마철의 질병과 활의 아교 문제 등을 들어 반대했다고 전해집니다(이른바 4불가론).

그럼에도 출병이 결정되어 이성계는 우군도통사로 군대를 이끌었으나,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장마로 발이 묶이자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설득해 군대를 돌렸습니다. 개경으로 돌아온 군대는 최영을 붙잡아 유배하고 우왕을 폐위하였으며, 최영은 얼마 뒤 처형되었습니다.

회군 이후 창왕, 이어 공양왕이 차례로 옹립되는 과정에서 이성계는 군사권과 정치적 주도권을 사실상 장악했습니다. 이 사건의 동기에 대해서는, 최영이 이성계를 제거하려 요동 정벌을 꾸몄다는 견해와 두 사람이 본래 가까웠다는 견해가 있어 사료마다 평가가 갈립니다.

조선 건국(1392)과 개혁

권력을 쥔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남은 등 급진 개혁파 신진사대부와 손잡고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조준 등이 주도한 과전법(1391)은 사전(私田)의 폐단을 정리하고 관료에게 수조권을 재분배한 제도로,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켰습니다. 다만 농민에게 직접 땅을 나눠 준 것은 아니라는 한계도 지적됩니다.

1392년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해 다친 틈을 타 정몽주가 개혁파를 견제하자, 이방원 일파가 개성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제거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1392년 음력 7월 17일(양력 8월 13일) 공양왕이 물러나고,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즉위했습니다. 고려는 약 475년 만에 막을 내렸고, 이때 그의 나이는 58세(만 56세)로 조선 왕 가운데 가장 늦게 즉위한 편이었습니다.

즉위 직후에는 국호를 한동안 고려로 유지하다가, 명과의 협의를 거쳐 1393년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습니다. 명은 곧바로 정식 국왕으로 책봉하지 않고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로 인정하였습니다.

1394년 계룡산·무악 등이 논의되다가 결국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고, 정도전이 경복궁과 종묘·사직의 배치 등 도성 계획을 주도했습니다. 1396년에는 한양 도성 축조가 시작되어 1년여 만에 마무리되었습니다. 또한 《조선경국전》, 《경제육전》 등 법전 편찬으로 새 왕조의 통치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왕자의 난과 퇴위

이성계는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막내 이방석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개국에 공이 큰 한씨 소생 왕자들, 특히 이방원이 이에 불만을 품었고, 1396년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이성계가 도성 안에 정릉을 조성하고 흥천사를 세워 추모했습니다.

1398년 정도전이 사병 혁파를 추진하는 가운데 이방원이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남은 일파와 방번·방석 형제를 제거했습니다(제1차 왕자의 난). 이성계는 곧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이 되었습니다. 이후 1400년 이방간이 이방원과 충돌한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그해 정종의 양위로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이성계는 태상왕이 되었습니다.

1402년에는 안변부사 조사의가 일으킨 반란(조사의의 난)이 있었습니다. 이성계가 이를 암묵적으로 뒷받침했다는 해석이 있으나, 반란은 태종이 이끄는 관군에게 진압되었습니다. 이 과정과 이성계의 함경도 거처를 두고 사료 해석이 엇갈립니다.

함흥차사 이야기와 말년

'함흥차사(咸興差使)'는 아들 태종이 보낸 사신을 이성계가 함흥에서 죽이거나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데서 나온 말로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는 후대에 퍼진 야사·설화의 성격이 강합니다. 실록에 근거한 설명에서는 함흥으로 갔던 사신이 모두 죽은 것은 아니며 살아 돌아온 사람도 많았다고 하고, 무학대사가 설득해 이성계를 돌아오게 했다는 이야기 역시 야사로 분류됩니다.

이성계의 거처는 사료마다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1401년 소요산 행궁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고, 한양 대신 개경으로 돌아갔다가 이후 환궁했다는 서술도 있습니다. 정확한 시기와 경로는 확정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말년의 이성계는 불교에 의지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태종 2년(1402) 실록에는 불교를 숭상하는 이유를 두 아들(방번·방석)과 사위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라고 말한 기록이 있습니다. 1408년 음력 5월 24일(양력 6월 27일) 창덕궁에서 중풍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나이는 기록에 따라 72세로 전하기도 하고 74세로 헤아리기도 합니다.

가족

정비 신의왕후 한씨(1337~1391)는 안변 출신으로, 이성계가 즉위하기 전인 1391년에 세상을 떠나 뒤에 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6남을 낳았는데, 진안대군 방우, 정종(방과), 익안대군 방의, 회안대군 방간, 태종(방원), 덕안대군 방연이며, 딸로 경신공주·경선공주가 있습니다.

계비 신덕왕후 강씨(1356~1396)는 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 두 아들과 경순공주를 낳았습니다. 이성계는 그를 매우 아꼈다고 하며, 사후 정릉(현 서울 성북구)을 조성했으나 훗날 태종 대에 격하되어 이장되었습니다.

후궁으로는 정경궁주 유씨, 화의옹주 김씨, 찬덕 주씨, 성비 원씨 등이 알려져 있으며, 기록에는 8남 5녀로 전합니다. 8명의 아들 가운데 5명이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방번과 방석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숨졌습니다. 1396~1397년에는 명 황제 주원장 측과의 혼담이 오갔다가 명 측의 통보로 무산되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습니다.

건원릉과 시호

이성계는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의 건원릉(健元陵)에 모셔져 있습니다. 동구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능이며, 봉분의 풀을 조성 때부터 다듬지 않고 두었다가 해마다 한 번 베어 내는 전통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태종이 고향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 덮었다는 이야기는 전승으로 전해질 뿐 확실하지 않습니다.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입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황제로 추존되어 태조고황제(高皇帝)의 존호를 받았습니다. 어진은 전주 경기전에 모셔진 것이 대표적이며, 이를 본뜬 초상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평가

긍정적 평가. 홍건적·왜구·여진·원 세력을 막아 낸 명장이었고, 고려 말 사전(私田) 문제와 토지 겸병을 개혁해 새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놓았다고 평가됩니다. 인재를 폭넓게 등용하고 개국공신을 예우한 점, 격식보다 실용을 중시한 성품이라는 서술도 있습니다.

비판적 평가. 막내 방석을 세자로 세워 형제 갈등을 키운 후계 문제, 고려 왕씨 일족이 크게 희생된 일, 사초를 고치게 하며 사관과 갈등을 빚은 점, 명에 대한 저자세 외교 등이 비판받습니다. 왕씨 일족 희생의 규모와 우왕·창왕·공양왕의 죽음에 대한 관여는 기록의 신빙성을 두고 논쟁이 있습니다.

논쟁.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가 정당했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와 대중의 평가가 엇갈립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창업군주보다 '명장 이성계'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일화와 전승

이성계에 얽힌 이야기는 실록에 근거한 것과 후대의 설화가 섞여 있어 구분이 필요합니다.

북한 학계에서는 고려를 저버린 인물로 낮게 평가하는 등, 이성계에 대한 인식은 시대와 입장에 따라 크게 달라 왔습니다.

묘소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 건원릉(健元陵)

후손

정비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정종(방과)·태종(방원)을 비롯해 세종 이래 조선 역대 국왕이 그의 후손이며, 전주 이씨 왕실의 시조로 받들어집니다.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방번·방석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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