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 때 원나라를 오가며 평해를 군으로 올린 문하시중, 문절공파 파조
| 시대 | 고려 후기 |
| 본관 | 평해 황씨 |
황서(黃瑞)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해입니다. 평해 황씨 3세 문하시중 황유중(黃裕中)의 둘째 아들이며, 형 황진(黃璡), 동생 황용(黃墉)과 함께 4세조로서 평해 황씨의 세 큰 줄기를 이룹니다. 그는 이 가운데 평해 황씨 문절공파의 파조로 받들어집니다. 파 이름은 자료마다 문절공파와 충절공파로 엇갈려 적히는데, 이 글에서는 위키백과와 문중 자료에서 흔히 쓰는 문절공파를 따릅니다.
자료에 따르면 황서는 충렬왕 때 세자를 모시고 원나라에 세 차례 다녀온 공으로 이름을 얻었습니다. 위키백과 평해 황씨 항목은 이후에도 충렬왕·충선왕 이후 여러 왕의 조정을 섬기며 원나라를 모두 서른한 번 오갔다고도 적고 있어, 횟수는 '세 번'과 '서른한 번'으로 설명이 갈립니다. 어느 쪽이든 이 사행의 공으로 금자광록대부·금어대·첨의평리를 거쳐 종1품 문하시중에 올랐다고 하며, 가장 널리 알려진 업적은 본관인 평해현이 평해군으로 승격된 일입니다. 고려의 문헌을 모은 『문헌통고』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설명도 전합니다.
조선이 들어서며 고려 때의 기록이 많이 훼손되어 그의 생몰년과 묘소 등은 자세히 전하지 않습니다. 그의 외아들은 호부전서를 지낸 황종량(黃宗亮)으로 이어지고, 6세 황세영을 거쳐 7세에서 예빈공파 계통이 갈라져 나왔으며 훗날 해월 황여일도 이 계통에서 나왔습니다. 1980년 8월에는 후손들이 울진군 기성면 척산리에 문절공 황서 신도비를 세워 그의 생애와 윗대의 기록을 돌에 남겼습니다. 평해 월송정이 이때 평해가 군으로 오르면서 세워졌다는 설이 유력하게 소개되지만, 창건 시기에 관해서는 고려 충숙왕 때 존무사 박숙이 지었다는 등 다른 설도 있어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평해 황씨에는 황서가 두 사람 있습니다. 이 글의 황서(고려 문하시중)와 달리, 1552년(명종 7)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해 경상도 어사, 직제학, 청홍도관찰사 등을 지낸 조선 중기의 황서(자 정옥)가 따로 있다고 위키백과 평해 황씨 항목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을 섞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묘소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울진군 기성면 척산리에 1980년 8월 세운 신도비(문절공황서신도비)가 있습니다.
아들 황종량(호부전서)으로 이어져 문절공파(예빈공파·해월공파 등)를 이룹니다.
고려 후기 평해 황씨 4세로, 충렬왕 때 원나라를 오가며 쌓은 공으로 문하시중에 올랐고 평해현을 평해군으로 올렸다고 전하는 문절공파 파조입니다.
위키백과 평해 황씨 항목은 충렬왕 때 세자를 모시고 세 번 갔다고 하면서 이후 여러 왕을 섬기며 모두 서른한 번 다녀왔다고도 적어 설명이 갈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