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수 권율의 종사관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한 문신, 호 해월, 해월공파 파조이자 족보를 다시 펴낸 인물
| 생몰 | 1556 ~ 1622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평해 황씨 |
황여일(黃汝一, 1556~1622)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해, 자는 회원(會元)입니다. 호는 해월헌(海月軒)·매월헌(梅月軒)으로 알려져 있고, 해월이라는 호로 가장 널리 불립니다. 울진 기성면 사동리에서 태어났으며, 평해 황씨 14세로 문절공파 예빈공파 계통의 해월공파를 열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의 자료는 증조부 황세충, 조부 황연, 아버지 유학 황응징(黃應澄)으로 적고 있습니다. 일부 소개 글에는 황응청이라는 표기가 보이나, 인물 사전 본문의 부친 이름은 황응징이어서 이 글은 황응징을 따릅니다.
그는 1576년 진사가 되고 1585년 개종계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습니다. 1588년 검열이 되었으나 하번 사관으로 출입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고, 1594년 형조정랑을 거쳐 권율의 종사관으로 내려가 임진왜란에 참전했습니다. 이 공으로 선무원종공신 2등에 올랐다고 하며, 위키백과는 선무훈이등공신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후 사서와 장령, 장악원정을 거쳐 1601년 예천군수, 1606년 전적, 1611년 길주목사, 1617년 동래진병마첨절제사를 지냈습니다. 선조 때 변무 진주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는데, 사행 시기는 소개 글마다 1598년 무렵과 선조 때로 다르게 적혀 있고, 이때의 기록이 『조천록』으로 전합니다.
그가 후손에게 남긴 가장 큰 일은 족보입니다. 임진왜란으로 집안의 족보가 불타 없어지자, 예천군수 시절인 1604년 『평해황씨초간세보』를 펴내 선대의 관직과 묘소를 비교적 자세히 되살렸습니다. 그 서문에는 대대로 벼슬하던 집안이 흩어져 길에서 만난 사람보다 멀어진 것을 통탄하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그가 살던 곳의 해월헌은 1588년에 지은 정자로 알려져 있고, 1847년 후손들이 지금 자리로 옮겼으며, 편액은 이산해가 썼다고 전합니다. 이 집이 울진 평해황씨 해월종택으로 경상북도 민속문화유산이며, 사당에 그의 불천위 위패를 모십니다. 사후 이조참판에 증직되었고, 평해 명계서원에 제향되었으며, 문집 『해월집』은 14권 7책으로 1776년 명계서원에서 간행되었습니다. 아들 황중윤도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의 해월종택은 정침·방앗간채·사당 등 3동으로 이루어지며, 정자 해월헌은 정면 네 칸의 누마루 건물입니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유산으로 2012년 지정되었으며 지정 번호는 소개마다 달라 이 글에서는 적지 않습니다.
묘소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해월종택 사당에 불천위 위패를 모십니다.
아들 황중윤이 문과에 급제했고, 독립운동가 황만영은 11대손이라고 전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는 황응징으로 적고 있습니다. 황응청으로 쓴 소개도 있으나 인물 사전 본문의 표기를 따랐습니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평해 황씨 족보를 1604년 다시 펴냈고, 해월공파의 파조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