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하고 학문을 좋아한 고려 중기 문신, 대제학공파의 중심 인물
| 생몰 | 1087 ~ 1152 |
| 시대 | 고려 중기 |
| 본관 | 초계 정씨 |
정복경(鄭復卿, 1087~1152)은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세귀(世貴)이며, 초계 정씨 3세입니다. 중시조 정문의 아들이고 시조 정배걸의 손자입니다. 『초계정씨족보』에는 이름이 鄭福卿으로 적혀 있으나, 그의 묘지명을 기본 자료로 삼아 지금은 鄭復卿으로 바로잡아 쓰고 있습니다. 위키백과 분류에는 사망 연도가 1151년으로 된 곳도 있으나, 본문과 묘지문은 모두 1152년(의종 6) 12월, 66세로 기록합니다.
할아버지의 음덕으로 관직에 나아갔고, 예종 때 전시에 급제한 뒤 평주를 다스렸습니다. 인종 때 국학직학·합문지후·승평군 지사·예빈주부 겸 당후관·상식봉어를 거쳐 춘주도안찰사로 나갔고, 의종 때는 시호부원외랑·예부낭중으로 상주 수령을 지냈습니다. 이어 호부·예부원외랑을 거쳐 시군기소감에 올랐고 자금어대를 하사받았습니다.
묘지명은 그가 학문을 좋아하고 청렴하며 검소했다고 전합니다. 공적인 일이 아니면 고위 관료의 집을 찾지 않았고, 재산을 모으는 데 마음이 없어 집에는 책상과 나무 의자 정도만 있었다고 합니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 간의대부 김자의가 그를 천거하는 상소를 올려 식견과 품행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묘지명은 1154년 5월에 쓰였으며, 학문과 청렴, 김자의의 천거를 기록하고 조상의 공덕과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는 명을 붙였습니다. 부인 김씨와의 사이에 4남 2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장남 정영도는 음서로 양온령이 되었고, 차남 정덕구와 사남 정효윤은 천태종 승려가 되었으며, 삼남 정영충은 어려서 관직이 없었고, 딸 하나는 권안국에게 시집갔습니다. 한편 대제학공파의 계통 해설은 그의 독자 정윤기를 파의 이어짐으로 설명하여 자료마다 차이가 있으므로 병기합니다.
묘지명에 따르면 1154년 5월 14일 대법운산 동북쪽 기슭에 장사 지냈다고 합니다. 현재 위치는 이 초안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