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목사·덕원부사·황해도관찰사를 지낸 개항기 관료, 원산학사 설립을 지원하고 『교방가요』를 쓴 인물(호 박원)
| 생몰 | 1817 ~ 1899 |
| 시대 | 조선 말기·개항기 |
| 본관 | 초계 정씨 |
정현석(鄭顯奭, 1817~1899)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초계이며 자는 보여(保汝), 호는 박원(璞園)입니다. 동지중추부사 정홍관의 손자이고 필선 정기화의 아들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그의 생몰 연도를 미상으로 두고 있어 위키백과의 1817~1899를 따르되, 『교방가요』의 간행 연도를 1865년과 1872년으로 달리 적는 자료가 있듯 세부 연대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1864년(고종 1) 함경도 고원군수로 있을 때 치적이 높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삼가현감·진주목사·김해부사를 지냈습니다. 진주목사 재임 중 진주 교방의 노래와 춤을 기록한 『교방가요』를 지었고 의암별제를 만들었다고 하며, 이 책은 진주검무와 의암별제 등 진주 전통 예능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쓰입니다. 김해와 덕원이 연해의 요충지라는 점에서 방비·교육·농잠·광무 분야 인재를 장려하는 방안을 조정에 건의했다고 합니다.
1883년 덕원부사 겸 원산감리로 부임했을 때 지역 주민들이 학교설립기금을 모아 새 학교를 세워 달라고 요청했고, 그가 이를 받아들여 지원한 것이 한국 최초의 근대식 학교로 소개되는 원산학사입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항목에는 원산학사가 직접 언급되어 있지 않아 설립 주체와 시기의 서술은 자료마다 다릅니다). 1886년 동지돈녕부사로 발탁되었고, 1894년 황해도관찰사로 동학농민운동 때 전신선을 끊은 장원석 등을 봉산에서 효수했으며, 그해 11월 정부로부터 견책을 받아 파직되었습니다. 이는 친일 내각이 왕실과 가까운 인물을 배제한 결과로 해석됩니다.
『교방가요』는 진주 교방의 가무를 기록한 책으로, 진주검무와 의암별제 같은 전통 예능을 복원하는 근거가 되어 왔습니다. 간행 연도는 한국무용사전이 1865년, 저서 항목이 1872년(고종 9)으로 달리 적고 있어 병기합니다. 이 문헌은 국립중앙도서관에 1권 1책이 전합니다.
묘소와 후손에 관한 사항은 이 초안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교방가요』 1권 1책이 소장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