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호남 의병을 일으켜 금산에서 순절한 의병장, 호는 제봉, 시호 충렬

| 생몰 | 1533 ~ 1592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장흥 고씨 |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본관은 장흥입니다.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태사(苔槎), 시호는 충렬(忠烈)입니다. 대사간을 지낸 고맹영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남평 서씨입니다. 1558년 식년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 전적, 호조·공조·형조 좌랑, 사간원 정언을 지냈고 1561년에는 평안도 암행어사로 나갔습니다.
1562년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직되었다가 1581년 복직하여 영암군수와 명나라 사행의 서장관을 지냈고, 서산·한산·순창 군수와 승문원 판교, 동래부사를 역임했습니다. 1591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원종공신에 책록되었으나 정치적 논란 끝에 사직하고 낙향했습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6천여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6월 1일 담양을 떠나 전주, 여산, 은진, 연산을 거쳤고, 7월 10일 금산군 와은평 일대에서 왜군과 싸우다 낙마하여 전사했습니다. 이때 둘째 아들 고인후도 함께 전사했고, 안영과 유팽로도 그를 부축하다 목숨을 잃었다고 전합니다.
고경명은 1558년 식년시 문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했다고 합니다. 이후 성균관 전적을 비롯해 호조·공조·형조의 좌랑과 사간원 정언을 지냈으며, 1561년에는 평안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습니다. 1562년 울산군수로 좌천되었다가 파직된 뒤 광주로 낙향해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고 소개됩니다.
아버지 고맹영이 정치적으로 몰락한 시기와 겹치는 것으로 설명하는 자료도 있습니다. 1581년 복직한 뒤에는 영암·서산·한산·순창 군수와 동래부사를 지냈습니다.
금산 전투에서 의병은 큰 희생을 내고 패했지만, 일본군이 전라도로 진출하는 기세를 꺾어 곡창 호남을 지키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됩니다. 광주 남구 제봉종가 연재는 그가 담양 추성관 회맹에서 전라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공조참의 겸 초토사에 임명되었다고 소개합니다.
장남 고종후가 시신을 수습해 광주로 돌아왔고 1593년 진주성에서 순절했습니다. 고경명은 사후 예조판서 겸 대제학을 거쳐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1595년 정려가 세워졌으며 1605년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습니다.
1592년 10월 화순현 흑토평 언덕에 묻혔다가 1609년 3월 장성현 오동리(지금의 장성군 장성읍 영천리)로 옮겼다고 합니다. 광주 포충사, 금산 성곡서원과 종용사, 순창 화산서원에서 기립니다.
아들 고종후·고인후·고순후·고용후 등과 손자 고부천 등이 전합니다. 후손은 광주 압촌과 담양 창평에 세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