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문신, 목화(무명)를 전래한 인물
| 생몰 | 1329 ~ 1398 |
| 시대 | 고려 말 |
| 본관 | 남평 문씨 |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남평,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1363년 사간원 좌정언으로 있을 때 계품사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에서 일어난 정변에서 덕흥군을 지지하였다는 혐의로 강제 귀국되어 벼슬을 빼앗기고 유배되었다.
1367년 귀국길에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들여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고향인 경상남도 산청에서 재배에 성공하여 우리나라 의생활을 크게 바꾸었다. 조선 태종 때 강성군에 증직되었고, 1440년 세종 때 영의정부사에 가증되고 부민후(富民侯)에 추봉되었으며 시호 충선(忠宣)을 받아 목화 전래의 상징적 인물로 기려진다.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과 함께 고향 산청에서 목화를 시험 재배해 3년 만에 성공했고, 이후 씨앗을 나누어 주며 재배를 장려했다고 전합니다. 씨를 빼고 실을 뽑는 도구도 익혀 보급해, 옷감이 삼베 중심에서 무명으로 넓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됩니다. 조식, 정약용 등 후대 학자들이 그 공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씨앗의 수는 『태조실록』이 십여 개, 남효온의 「목면기」가 세 개로 다르게 전합니다. 붓두껍에 숨겨 왔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주장이 있고, 덕흥군 지지 여부나 사신단 소속, 유배지에 대해서도 사료에 따라 설명이 다릅니다. 생몰년 역시 1329~1398 또는 1331~1400으로 자료마다 다릅니다.
1360년 문과에 급제해 김해부 사록, 순유박사를 거쳐 1363년 좌정언이 되었습니다. 우왕 때 전의감 주부·좌사의대부를 지내고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나, 공양왕 때 이성계 일파의 전제 개혁에 반대하다 조준의 탄핵으로 물러났다고 합니다. 1390년 낙향한 뒤 다시 벼슬하지 않고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고 전합니다.
산청군 단성면의 목면시배유지는 처음 목화를 재배한 곳으로 소개되는 국가 사적이며 전시관과 목화밭이 있습니다. 신안면 신안리에는 문익점을 모신 도천서원과 묘소(경상남도 기념물 제66호), 신도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3호)가 있습니다. 서원과 시배유지는 서로 다른 곳입니다.
문익점은 충선공파의 파조이며, 헌납공파·순질공파·의안공파·시중공파·성숙공파가 다섯 아들에서 갈라졌다고 설명됩니다. 산청 강성현 연고로 강성 문씨로 불리기도 합니다. 대구 달성 인흥마을의 남평문씨본리세거지는 그의 18세손 문경호가 터를 잡았다고 전합니다.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묘소가 있으며, 인근에 문익점신도비(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3호)가 세워져 있다. 묘역은 1983년 경상남도 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되었다.
다섯 아들(문중용·문중성·문중실·문중진·문중계)을 두었다. 손자 문래(文琜)·문영(文瑛)이 실 잣는 기구를 개량하였는데, 이들의 이름에서 '물레'라는 명칭이 유래했다는 설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