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에 참여하고 상하이로 망명해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 생몰 | 1901 ~ 1941 |
| 시대 | 일제강점기 |
| 본관 | 월성 박씨 |
박철준(朴喆俊, 1901년 11월 22일~1941년 6월 21일)은 위키백과가 독립운동가로 소개하며 월성 박씨의 주요 인물로 꼽는 사람입니다. 아명은 박예겸·박지훈·박지원, 호는 동풍·필목·필암·우석·강포입니다. 경기도 인천 제물포 용동촌에서 태어나 한때 강화군 교동면 대룡리에서 유아기를 보냈고, 1914년 인천고등상업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19년 3월 6일 동맹 휴교가 이어지던 때 학생들이 경찰의 감시를 받자, 그는 같은 학교 후배 김명진 등과 의논해 먼저 통신을 방해하기로 했습니다. 3월 8일 밤 9시쯤 학교에 들어가 박철준은 망을 보고 김명진이 전선 절단용 가위로 전화 공중선을 끊고 사무실 수화기를 부쉈습니다. 이 일로 체포되어 퇴학당했고,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전신법 위반으로 태형 90도를 받았습니다.
192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아래에서 한국독립당 행정자치위원, 국가민족군사책략위원 등을 지냈고, 1933년 탈당했다고 위키백과가 적습니다. 그 뒤 소작농과 나막신 장수로 지내다 병을 얻어 1938년 푸젠성 푸저우에서 귀국했고, 경기도 장단에서 요양하다 1941년 병사했습니다. 유해는 화장해 인천 월미도 앞바다에 뿌려졌으며, 정부는 2009년 3월 1일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습니다.
동맹 휴교 5일째, 학생들이 엄중한 취조를 받자 박철준은 김명진 등과 함께 먼저 통신을 방해하기로 했습니다. 1919년 3월 8일 밤 학교 2층에서 전화선을 끊은 일로 체포되었습니다.
1921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아래에서 활동했다고 합니다. 위키백과 서술은 당 가입 연도와 직책 기간에 모호한 부분이 있어 연도를 확정해 쓰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2009년 3·1절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습니다. 본관은 위키백과 월성 박씨 항목이 그를 주요 인물로 링크하고 있어 월성으로 소개하며, 국가보훈부 공훈록으로 직접 대조하지는 못했습니다.
유해를 화장해 인천 월미도 앞바다에 뿌렸다고 합니다.
1919년 인천에서 3·1 운동에 호응해 통신을 끊다 체포되었고 상하이로 망명해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