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였던 무신
| 생몰 | 1534 ~ 1593 |
| 시대 | 조선 중기(임진왜란) |
| 본관 | 울산 박씨 |
박홍(朴泓, 1534~1593)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위키백과가 본관을 울산, 자를 청원으로 적습니다. 1556년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 강계부판관, 종성부사 등을 지냈습니다. 위키백과에 인용된 글은 그의 시조 박윤웅이 고려 태조를 도왔다고 하고, 조선에 들어와 박유(朴愈)가 문과에 급제했으며 대흥현으로 이사했다고 가계를 설명합니다. 증조 박원창, 할아버지 박한, 아버지 박영무로 이어지고 어머니는 정인걸의 딸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그는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였는데, 위키백과의 본문은 왜군이 몰려오자 판옥선 40척을 구멍 내 침몰시키고 군량 창고를 불태운 뒤 달아났으며 동래성 전투에서도 싸우지 못하고 물러났다고 적습니다. 반면 같은 항목이 인용한 글은 중과부적으로 본진을 지키는 데 머물렀다고 쓰고, 그의 용맹과 행정 능력과 효성을 높이 평가합니다. 이처럼 평가가 엇갈립니다.
이후 그는 좌위대장으로 임진강을 지켰으나 패했고, 성천에서 우위대장과 의용도대장이 되었습니다. 대간의 탄핵으로 관작이 삭탈되어 백의종군한 일도 있었고, 1593년 평양이 수복된 뒤 파주로 종군하다 병이 깊어져 고향 호서로 돌아가던 중 배 위에서 향년 60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중에 병조참판이 추증되었다고 하며, 아들로 박진남·박정남·박우남 등이 전합니다.
젊어서 활솜씨가 뛰어났고, 정평부사 때 치적으로 포상을 받았으며 평산부사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고 도적을 해산시켰습니다. 만포첨사 시절 여진족을 다독였고 종성부사 때에는 추장을 유인해 항복받아 포로와 곡물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본문은 도망했다고 쓰고 인용문은 중과부적으로 버텼다고 쓰는 것은, 당시 조정이 의주에 있어 정보가 부정확했고 상벌이 뒤바뀌었다고 인용문 스스로 밝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이트는 어느 한쪽을 단정하지 않습니다.
부인은 강릉 최씨 군수 최공필의 딸이며, 정실 소생은 3남 2녀입니다. 장남 박진남(무과 출신 군수), 차남 박정남(진사), 삼남 박우남(무과 출신 현감)이 있고 측실 소생 5남 2녀도 대부분 무과에 급제했다고 합니다.
고향 근처 봉수산에 장례를 치렀다고 전하며, 선영 아래로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초 행적에 대해 달아났다는 서술과 중과부적으로 버텼다는 서술이 함께 전해 평가가 엇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