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독립군사령부를 조직해 총독 암살을 계획한 독립운동가(이명 박환)
| 생몰 | 1882 ~ 1929 |
| 시대 | 일제강점기 |
| 본관 | 진원 박씨 |
박문용(朴文鎔, 1882~1929)은 전남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진원, 이명은 박환(朴桓)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1882~1929년으로, 보성의 기념비 관련 기사는 1882~1927년 7월 20일로 적어 사망 연도가 갈립니다. 한 기사는 임진왜란 의병장 박광전의 11대손이라고 소개합니다. 1911년 20여 년간 중국 등지를 떠돌다 귀향해 고흥 거금보통학교 교장을 지냈고, 1913년 보성군 복내면장을 거쳐 같은 해 6월 겸백면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1913년 12월 8일 면에서 거둔 돈 327원 6전을 가지고 박환이라는 가명으로 중국으로 망명했고, 베이징의 진문대학에서 공부하고 톈진에서 신민보 기자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1919년 톈진의 독립운동단체 천진불변단에 참여해 8월 부단장 겸 의사부장이 되었고, 7월 상하이에서 안창호를 만났으며, 10월 31일 '제2의 독립선언서'에 대한민국대표 30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고 합니다. 이후 임시정부 국내 특파원으로 전라도 방면을 맡았다고 전합니다.
1920년 한우석과 함께 조선독립군사령부(대한군정서)의 국내 조직을 꾀하고, 8월 24일 미국 의원단의 경성 방문에 맞춰 총독·정무총감과 친일파를 처단하려는 암살 계획을 추진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습니다. 1921년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고, 1924년 병보석으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왔으나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980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으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애국장, 기념비 기사는 '국민장'으로 적고 나무위키는 독립장으로 적어 훈격 표기가 자료마다 다릅니다. 보성 겸백에는 1982년 5월 세운 '의사 박공문용 기적비'가 현충시설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1913년 말 중국으로 건너간 박문용은 1914년 무렵 베이징에서 공부하고 톈진에서 신문기자로 일했다고 합니다. 1919년 8월에는 톈진의 천진불변단 부단장 겸 의사부장이 되었고, 10월 31일에는 '제2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대한민국대표 30인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 상하이에서 안창호와 회견한 일도 기록에 전합니다.
1920년 2월 한우석과 상하이에 가서 김철을 만나 권총을 빌려 달라고 요청한 뒤, 3월 경성으로 돌아와 조선독립군사령부 조직에 나섰다고 합니다. 6월에는 광주에서 권총을 지니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한우석이 검거되면서 8월 24일의 암살 계획은 이루지 못한 채 본인도 체포되었습니다.
1921년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이 징역 7년을 선고했다는 기록이 판결문 등을 근거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실려 있습니다.
박문용은 1924년 병보석으로 풀려나 고향 보성으로 돌아와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1982년 5월 세운 '의사 박공문용 기적비'는 보성 쇠실쉼터 부근에서 김구 은거비 옆에 서 있다고 하며,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현충시설입니다.
겸백면 사곡리 초암산 기슭에 묘소가 있다고 합니다. 보성에는 1982년 건립된 기적비가 있습니다.
1980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애국장·국민장·독립장 등 자료마다 표기가 갈려 공훈록으로 확인이 필요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1929년, 기념비 기사는 1927년 7월 20일로 적어 자료가 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