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 영의정을 지낸 문신, 창녕부원군, 호는 독곡, 시호 문경, 독곡공파 파조
| 생몰 | 1338 ~ 1423 |
| 시대 | 고려 말~조선 초 |
| 본관 | 창녕 성씨 |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친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이며,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시호는 문경(文景)입니다. 창녕부원군 성여완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밀직사 지신사 나천부의 딸입니다. 동생으로 성석용·성석인이 있으며, 순흥 안씨 안원숭의 딸과 혼인해 아들 성지도·성발도와 두 딸을 두었습니다.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급제하여 전리총랑을 지냈으나 신돈의 모함으로 해주목사로 좌천되었습니다. 우왕 즉위 후에는 왜구를 물리치는 데 참여해 공신이 되었지만 양백연의 옥사에 연루되어 함안으로 유배되었다가 돌아왔습니다. 양광도 관찰사로 있던 해에 큰 흉년이 들자 의창(義倉)을 설치해 백성을 구제했고, 이 방법이 다른 도로 퍼졌다고 합니다. 1389년에는 이성계와 뜻을 모아 공양왕을 세웠고, 그 공으로 9공신에 올랐습니다.
조선이 열린 뒤에는 1395년 초대 판한성부사로 임명되었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1415년(태종 15) 영의정부사에 올랐으며 창녕부원군에 봉해졌습니다. 《국조명신록》에는 이성계의 오랜 벗으로서 함흥에 머문 태조를 모셔 오기 위한 함흥차사를 자원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데, 이는 후대에 전해진 일화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시문과 진초(眞草) 글씨에 뛰어났고, 1423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생들의 후손에서 성삼문·성담수(성석용계)와 성현(성석인계)이 나와, 그는 형제를 포함한 가문의 중심 인물로 꼽힙니다.
독곡공파는 그의 시호를 따서 문경공파라고도 하며, 후손은 파조를 1세로 세어 22세부터 32세까지 별도의 항렬자를 쓰는 것으로 소개됩니다. 아들 성지도·성발도 이후의 세계는 이번에 자료로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후손이라면 문중 족보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양광도 관찰사 시절 의창을 설치해 흉년의 백성을 구한 일이 가장 널리 알려진 업적입니다. 글씨도 진서와 초서에 모두 능해 명필로 이름이 높았으며, 문집 『독곡집』이 전합니다. 그가 모셨던 이성계와의 관계는 개국 공신 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리에 묘가 있으며, 1986년 포천시 향토유적 제22호 「성석린 선생 묘」로 지정되었습니다. 문집 『독곡집』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95호입니다.
아들 성지도·성발도가 있으며, 후손이 독곡공파(문경공파)를 이룹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1415년(태종 15)입니다.
『독곡집』이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9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