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정치인, 일제 말 협력 행적이 논란이 된 인물
| 생몰 | 1891 ~ 1973 |
| 시대 | 근현대 |
| 본관 | 함양 여씨 |
여운홍(呂運弘, 1891~1973)은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동생으로 본관은 함양, 호는 근농(槿儂)입니다. 1891년 9월 1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에서 태어나 1909년 중앙중학교를 졸업했고, 1913년 미국으로 유학해 오하이오주 우스터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1918)한 뒤 프린스턴 신학원에 진학했으나 중퇴하고 귀국했습니다. 부친은 여정현, 모친은 경주 이씨입니다.
1919년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고, 같은 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습니다. 1920년에는 상하이 인성학교 교장을 지냈고 광저우에 파견되어 쑨원에게 임시정부 측 서한을 전했습니다. 일본 경찰의 감시와 체포를 여러 차례 겪었습니다.
일제 말기에는 1941년 이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시국강연과 친일 성격의 글 기고, 좌담회 참석 등 부일협력 활동을 했다고 위키백과가 서술합니다.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고 문서 분류도 수록자로 되어 있으나, 최종 수록 여부는 친일인명사전 원문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1945년 형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고, 1946년 5월 조선인민당을 탈당해 사회민주당을 창당했습니다. 같은 해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선임되었으며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948년에는 남북협상으로 평양을 방문했으나 소극적으로 활동하고 같은 해 5월 돌아왔습니다.
그는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 양평군에서 당선되었고, 1954년 제3대 총선(서울 종로구 을)에서는 낙선했습니다. 1960년 제5대 참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3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6대 총선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습니다. 1973년 81세로 별세했습니다.
그는 청년기 독립운동과 광복 후 정치 활동으로 알려지는 동시에, 일제 말기 협력 행적이 비판받는 인물입니다. 한 사람 안의 이 대비는 당시 지식인들이 겪은 선택과 압박을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묘소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1973년 2월 3일 서울 자택에서 별세했습니다.
아들로 여성구, 여명구가 있다고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