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개마을 출신 유학자, 심즉리설과 이발일도설을 세워 한주학파를 연 학자, 호는 한주

| 생몰 | 1818 ~ 1886 |
| 시대 | 조선 후기 |
| 본관 | 성산 이씨 |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은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본관은 성산, 자는 여뢰(汝雷), 호는 한주(寒洲)입니다. 1818년 성주목 유동면 대포동(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마을)에서 이원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8세에 아버지에게 『통감절요』를 배웠고 17세에 숙부 이원조의 권유로 성리학에 전념해 『성리대전』을 깊이 연구했다고 합니다. 1849년 생원시에 입격해 성균관 생원이 되었으나 대과는 포기했고, 1884년 유일(遺逸)로 의금부도사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자와 이황의 주리론을 바탕으로 이기호발설에서 리(理)의 발만 인정하는 '이발일도(理發一途)'를 주장했고, 나아가 마음이 곧 리라는 '심즉리(心卽理)'설을 내세웠습니다. 이는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켜 이단으로 간주되거나 도산서원의 반발을 사기도 했으나, 그의 학설은 경북 서남부와 경남 북동부 등으로 퍼져 '한주학파'를 이루었습니다. 저서로 『이학종요』·『사례집요』·『묘충록』 등이 있고, 이를 모은 것이 『한주집』입니다. 다만 한국어 위키백과는 그를 '주리설의 완성자' 정도로만 간략히 소개합니다.
현실 문제에도 관심이 깊어 1857년 사대의 예 철폐를 주장하는 상소를 지었으나 올리지 않았고, 1862년 삼남 민란 때 「응지대책」을 올렸으며 1866년에는 국가제도 개혁안 『묘충록』을 저술했다고 합니다. 1871년 서원철폐령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고 1876년 운요호 사건 때는 의병을 계획했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철회했으며, 『조선책략』을 비판하는 글도 지었습니다. 한편 서양 학문에도 비교적 관심을 가져 유학과 함께 시대에 필요한 실용 학문을 활용할 것을 주장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학맥은 외아들 이승희와 곽종석, 장석영 등으로 이어졌고, 성주 대산동에는 한주종택이, 같은 마을에는 1897년 지역 유림이 세운 삼봉서당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일부 문헌에서는 그의 본관이 '성주 이씨'로 적히기도 하나, 이는 성주 일대의 여러 이씨가 한때 성주 이씨로 통일되어 불린 역사와 관련된 혼동으로 보입니다.
주리론에서 리의 발만 인정하는 이발일도, 그리고 마음이 곧 리라는 심즉리설을 세웠습니다.
『묘충록』으로 국가제도 개혁안을 제시했고 서원철폐령에 반대했으며 척사의 입장도 보였습니다.
묘소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성주 대산동 한주종택과 삼봉서당이 관련 유적으로 전합니다.
외아들 이승희(독립운동가)와 1남 5녀를 두었다고 합니다(나무위키).
이발일도설과 심즉리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