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강목』을 지은 실학자·역사학자, 호는 순암

| 생몰 | 1712 ~ 1791 |
| 시대 | 조선 후기 |
| 본관 | 광주 안씨 |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역사학자로, 본관은 광주(廣州)입니다.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한산병은·우이자·상헌 등이며, 충청도 제천에서 태어나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텃골)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성호 이익의 문인으로 경세치용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고,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통사 『동사강목』(1759년 일단 완성)을 남겼습니다.
고조 안시성은 현감, 증조 안신행은 종8품 빙고별검을 지냈으나 조부 때부터 남인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며 집안이 기울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았고 아버지가 평생 처사로 지내 이사가 잦아 10세에야 『소학』을 배웠는데, 그런 환경에서도 독학과 가학으로 경사·병서·의약·역학까지 두루 읽어 학문의 바탕을 쌓았습니다. 1749년 음직으로 만녕전 참봉에 올라 의영고 봉사, 귀후서 별제, 사헌부 감찰을 지냈습니다.
1772년부터 세자익위사 익찬 등으로 세손(뒤의 정조)을 가르쳤고, 1776년 목천현감으로 나가 동약·향약·향사례 시행, 방역소 설치 등의 치적을 남겼습니다. 말년에는 천주교를 철저히 비판해 『천학고』와 『천학문답』(1785)을 썼으며, 1790년 가선대부에 올랐고 사후 1801년 광성군에 추봉되었으며 1871년 문숙(文肅)의 시호를 받았습니다.
안정복의 초기 학문은 스승 없이 가학과 독서로 이루어졌습니다. 조부가 벼슬을 그만두고 무주 적상산에 들어가자 그곳에서 지냈고, 1735년 조부의 사망 뒤 고향 덕곡리로 돌아와 ‘순암’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학문에 몰두했습니다. 1737년 『치통도』·『도통도』, 이듬해 『치현보』와 『향사법』을 지었고, 1740년(29세)에는 초기 학문의 결실인 『하학지남』을 썼습니다. 1744년에는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현실 개혁에 눈을 떴습니다.
1746년 안산에 살던 이익을 찾아 문인이 되면서 학문은 새 전기를 맞았습니다. 윤동규·이병휴와는 동료이자 선배로, 권철신·이기양·이가환·황덕길 등과는 스승과 후학으로 교류했습니다. 다만 35세까지 가학으로 쌓은 사유 구조가 단단해, 같은 근기남인 가운데서도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섰다고 평가됩니다.
『동사강목』은 유형원의 『동사강목범례』를 시초로 하고 이익의 조언을 받아 쓴 역사서로, 유형원에서 이익, 안정복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결실로 이해됩니다. 단군조선에서 고려 말까지를 강목체로 정리했으며, 1759년에 일단 완성한 뒤에도 다듬어 나갔습니다.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고 신라도 정통으로 보는 균형 잡힌 시각을 취했다고 평가됩니다.
이외에도 『열조통기』, 『임관정요』(뒷날 정약용 『목민심서』에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성호사설유선』, 『잡동산이』, 문집 『순암집』 등 20여 편의 저술이 전합니다. 『잡동산이』는 형식을 갖춘 저술은 아니지만 그의 경학관과 역사관을 알려 주는 자료입니다.
이익의 문인들 사이에 천주교와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안정복은 이단 배척을 분명히 했습니다. 1785년 『천학고』와 『천학문답』으로 천주교의 내세관이 현실을 부정한다고 비판했고, 제자이자 사돈인 권철신과 사위 권일신에게 편지를 보내 입교를 말렸습니다. 이 때문에 사후 1801년 천주교를 탄압하던 노론 벽파로부터 공을 인정받아 자헌대부 광성군에 추봉되었고, 근기남인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인물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생계는 넉넉하지 않아 종답을 되사려고 노비와 함께 숯을 구운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고향 영장산 아래에는 선영을 모시고 제자를 가르친 이택재(여택재)가 있으며, 소실되었다가 1970년대에 정부의 도움으로 재건되어 오늘에 이릅니다.
경기도 광주시 중대동(옛 경안면 중대리). 묘 아래에 양증조부 안신행, 손자 안철중의 묘가 있고 입구에 이택재가 있다고 합니다.
아들 안경증, 사위 권일신이 알려져 있으며, 후손은 텃골의 순암종가를 중심으로 광주에 세거합니다.
광주 안씨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위키백과가 모두 본관을 광주로 적습니다.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를 강목체로 정리한 통사로, 1759년 일단 완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