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인물지』를 펴낸 역사학자·계몽운동가, 호 함재
| 생몰 | 1924 |
| 시대 | 개항기~일제강점기 |
| 본관 | 광주 안씨 |
안종화(安鍾和, ?~1924)는 개항기와 대한제국기에 활동한 역사학자·계몽운동가이자 교육자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사응(士應), 호는 함재(涵齋)입니다. 홍양(洪陽) 출신으로 안기원의 아들입니다. 대한제국기에 법부참서와 중추원 의관을 지냈습니다.
1894년(고종 3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궁내부 낭관, 법부참서, 세자시강원 시독을 거쳐 중추원 의관에 올랐습니다. 아버지는 김정희와 홍직필의 문하생으로 알려져, 안종화가 실학자들의 역사의식을 이어받았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최익현의 상소에 이어 이우면·박봉주·윤두병 등과 함께 조약 폐기와 오적 주살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1908년 기호흥학회 평의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했고,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뚜렷한 활동이 보이지 않으며 1924년 사망했습니다.
1878년 최초의 역사서 『동사취요』(필사본)를 지었고, 이는 1904년 『동사절요』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1907년에는 조선시대 인물 3,000명을 다룬 『국조인물지』를 펴내 인물 중심의 한국사를 정리하려 했습니다. 단군을 최초의 성인으로 인식하고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다루려 한 점은 그의 역사의식이 민족의식과 밀접했음을 보여 줍니다.
을사늑약 이후에는 대한자강회와 기호흥학회에서 활동하며 『초등본국역사』(1909), 『초등만국지리』(1909), 『초등대한지리』(1910), 『초등생리위생대요』(1908) 등 역사·지리·위생 교과서를 편찬했습니다. 교과서가 부족하던 시기 지식인들이 전공을 따지지 않고 보급에 나선 풍토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안종화의 역사 저술은 개항기부터 이어진 것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이를 실학자들의 역사의식을 계승·발전시킨 것으로 봅니다. 같은 광주 안씨의 선배 안정복이 『동사강목』으로 쓴 통사의 전통이 150여 년 뒤 안종화의 『동사절요』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으나, 두 사람의 직접적인 계승 관계는 자료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묘소 위치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동사취요』(1878), 『동사절요』(1904), 『국조인물지』(1907) 등의 역사서와 여러 교과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