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 계열의 학자, 임진왜란 때 소모사로 활동한 『풍애집』의 저자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광주 안씨 |
안민학(安敏學)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습지(習之)였다가 이습(而習)으로 고쳤으며, 호는 풍애(楓崖)입니다. 아버지는 찰방 안담이고 한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생몰년은 이번 자료에서 확인하지 못했고, 1561년 20세 무렵 천거를 받은 기록과 60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재질이 뛰어나 9세부터 『소학』·『효경』을 읽었고 20세 전후에 『심경』·『근사록』 등 성리학 서적을 접했습니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경·사·백가를 두루 읽었으며, 25세에 박순에게 나아가 사제관계를 맺은 뒤 이이·정철·이지함·성혼·고경명 등과 교유했습니다. 1561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원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580년 이이의 추천으로 희릉참봉이 되었습니다.
1583년 사헌부 감찰이 된 뒤 대흥·아산·현풍·태인 등지의 현감을 지냈고, 전주의 별서에 살던 중 임진왜란을 만나 소모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전라도 광주를 중심으로 군량 수천 석과 전마 수백 필, 정예 군사 수천 명을 모아 북상하다 아산에서 병을 얻어 나아가지 못했고, 그 병력과 군량은 체찰사 유성룡에게 넘겨졌습니다. 이 공으로 사도시첨정에 제수되었으나 노병으로 받지 않고 홍주 신평으로 돌아가 60세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조참의에 추증되었습니다.
안민학의 학문은 대체로 이이의 계열에 속했습니다. 박순에게 배운 뒤 이이·정철·이지함·성혼·고경명 등과 교유했다는 사실은 그가 16세기 후반 기호 지역 사림의 한 축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는 학문뿐 아니라 필법에서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이이가 1580년 그를 희릉참봉으로 천거한 일은 두 사람의 신뢰를 보여 줍니다.
소모사는 전란 때 지방에서 군사와 군량을 모으는 임시 직책입니다. 안민학이 모은 병력과 군량은 규모가 상당했으나 아산에서 병이 나 직접 북상하지 못했고, 조정은 그것을 체찰사 유성룡에게 돌렸습니다. 큰 공을 세우고도 관직을 사양한 그의 모습은 학자로서의 처신을 잘 보여 줍니다.
저서로 『풍애집』이 있으며, 이조참의에 추증되었습니다. 같은 광주 안씨의 안공·안황이 임진왜란에서 각기 활동한 것과 함께 이 전란이 가문의 여러 인물을 시험했음을 보여 줍니다.
홍주 신평으로 돌아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묘소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풍애(楓崖)입니다. 저서로 『풍애집』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