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성여자대학교와 근화여학교의 설립자, 여성 교육가·독립운동가
| 생몰 | 1879 ~ 1955 |
| 시대 | 일제강점기·현대 |
| 본관 | 연안 차씨 |
차미리사(1879~1955)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활동한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 본관은 연안입니다. '미리사'는 감리교회 세례명입니다. 한성부 종로방 화동 출신이며 본적은 경기도 고양군 아현리라고 하고, 출생 연도는 1879년설과 1880년설이 있습니다. 부모가 다섯 아이를 모두 잃고 오십 줄에 얻은 딸이어서 어려서 '섭섭이'로 불렸다고 합니다.
18살에 결혼했으나 3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재혼하지 않은 채 감리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1905년 선교사의 알선으로 중국에 건너가 1909년 쑤저우의 버지니아 여학교를 졸업했고, 1906년 미국에서 대동교육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해외에서도 구국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한일병합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쓰러진 뒤 청력을 잃어 평생 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1917년 귀국해 배화학당 교사 겸 사감으로 일하다 3·1 운동 때 비밀 연락에 힘을 보탰고, 1919년 여자 야학과 조선여자교육회를 시작으로 1921년 근화여학교를 세웠습니다. 학교는 수업료를 받지 않고 총독부나 선교사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운영했으며, 1934년 근화학원 재단을 설립하고 1935년에는 실업 교육을 강조해 근화여자실업학교로 바꾸었습니다. 광복 후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을 세웠고,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습니다.
근화(槿花)는 무궁화를 가리키는 말로, 교명에서부터 민족의 뜻을 담았습니다. 차미리사는 강연회·음악회·연극회·바자회를 열어 학교 운영 자금을 모았고, 허정숙·김일엽 등을 순회강연단으로 각지에 보내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알렸습니다.
중일전쟁 직후 총독부가 '근화'라는 명칭이 무궁화를 상징한다고 문제 삼자 1938년 학교 이름을 덕성으로 바꾸었으나 교표는 근화를 그대로 지켰습니다. 1940년에는 총독부의 압력으로 교장직에서 물러났고 창씨개명령도 거절했다고 전합니다.
덕성여자대학교는 1997년의 학내 분규를 계기로 국정감사 자료에 근거해 2000년 설립자를 송금선에서 차미리사로 바로잡았습니다. 차미리사는 2002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고, 학교 안에 기념관이 세워졌습니다.
1955년 경기도 양주군 우이동(현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매장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