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 때 급제해 찬성사에 오른 중암공파 파조, 호는 중암
| 생몰 | 1262 ~ 1340 |
| 시대 | 고려 후기 |
| 본관 | 평강 채씨 |
채홍철(1262~1340)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강, 자는 무민(無悶), 호는 중암(中菴)입니다.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해 장흥 부사 등을 지냈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불교와 음악을 깊이 연구했다고 합니다. 위키백과 평강 채씨 항목은 1283년 급제로 적고, 이후 응선부녹사·통례문지후를 거쳐 1308년 밀직부사, 1314년 지밀직사사, 1315년 첨의평리, 삼사사·찬성사를 지냈다고 정리합니다.
1320년 평강군에 봉해졌고, 1332년 찬성사로 복귀해 삼중대광 순천군에 봉해졌다고 합니다. 아들 채하중은 뒷날 우정승에 올라 평강부원군이 되었습니다. 자기 집 북쪽에 전단원을 지어 승려들이 머물게 하고 병든 사람에게 약을 나눠 주었으며, 중화당을 지어 전직 재상 여덟 명을 초대해 잔치를 열고 그 자리에서 〈자하동신곡〉을 지었다고 전합니다. 이 곡은 『고려악부』에 전합니다.
한편 1314년 충숙왕 때 토지와 세금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민전을 부당하게 차지해 큰 재산을 모았다는 비판도 함께 전해집니다. 중암공파의 파조로 받들어지며, 묘소는 전남 순천에 있다고 합니다.
충렬왕 때 급제해 장흥 부사를 지냈고, 밀직부사·지밀직사사·첨의평리를 거쳐 삼사사와 찬성사에 올랐다고 합니다. 위키백과 평강 채씨 항목의 연도(1283년 급제, 1308년 밀직부사, 1314년 지밀직사사, 1315년 첨의평리)를 따랐으며 다른 자료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불교와 음악에 몰두해 전단원을 두고 승려와 병자를 돕고, 중화당 잔치에서 〈자하동신곡〉을 지었다고 전합니다.
문화를 이끈 인물이라는 평가와 함께 민전을 점탈해 부를 쌓았다는 비판이 병존합니다. 아들 채하중은 정승에 올랐으나 말년에 비극을 맞았습니다.
전남 순천에 있다고 전하나, 정확한 위치는 이 초안에서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아들 채하중이 우정승에 올랐고, 그의 후손은 중암공파를 이룹니다.
고려 후기 찬성사를 지낸 문신으로 호는 중암, 중암공파의 파조입니다.
중화당 잔치에서 지었다는 〈자하동신곡〉이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