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때 영의정에 오른 남인의 영수, 신해통공과 수원 화성 축조를 이끈 번암

| 생몰 | 1720 ~ 1799 |
| 시대 | 조선 후기 |
| 본관 | 평강 채씨 |
채제공(1720~1799)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강,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 시호는 문숙(文肅)입니다. 충청도 홍주목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지중추부사를 지내고 뒤에 영의정에 추증된 채응일이며, 어머니는 연안 이씨입니다. 1743년 문과 정시에 병과로 급제했습니다.
1753년 호서 암행어사를 지냈고, 1758년 승정원 도승지로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하려 할 때 이를 막아 철회시킨 일이 알려져 있습니다. 1770년 병조판서, 1771년 호조판서로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한 뒤 형조판서를 맡았습니다. 우의정에 오른 해는 위키백과에서 1783년과 1788년이 함께 보이며, 1790년 좌의정, 1793년 영의정에 올랐고 1798년 사직해 판중추부사가 되었습니다.
정조는 영조 말부터 세손을 지켜 준 그를 신임해 남인의 영수로 중용했으며, 그는 정약용·이가환 같은 남인 학자들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1791년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을 주도했고, 초대 화성(수원)유수로서 정약용과 함께 수원 화성 축조를 맡았습니다. 『국조보감』 등의 편찬에도 참여했고, 문집은 『번암집』입니다.
1758년 도승지로 있을 때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하려 하자 이를 막아 철회시켰다고 합니다. 1762년 사도세자가 사사될 때 그는 모친상 중이었습니다. 이후 영조 말부터 세손(정조)을 보호했습니다.
정조 즉위 뒤 남인의 영수로 중용되어 1790년 좌의정, 1793년 영의정에 올랐습니다. 1791년에는 육의전 외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을 주도해 조선 상업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됩니다.
초대 수원(화성)유수로서 정약용과 함께 수원 화성 축조를 맡았고, 1781년 서명응과 함께 『국조보감』을 편찬하는 등 편찬 사업에도 참여했습니다.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확대되지 않도록 온건책을 편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나, 1801년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관작을 빼앗겼다가 1823년 회복되었습니다.
채제공 집안은 채유후·채팽윤으로 이어진 문장 전통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증손 채동술은 1861년 문과에 급제했으나 1881년 이재선 추대 역모를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죄로 처형되었고, 1908년 관직이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에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부여에는 그를 모신 도강영당(1965년 건립)이 있습니다.
계자(양자) 채홍원이 대를 이었고, 서자로 채홍근·채홍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정조 때 1793년 영의정에 오른 남인의 영수로 호는 번암입니다.
1791년 신해통공을 주도하고 수원 화성 축조를 맡았습니다.
경기도 용인시 역북동이며 경기도 기념물 제17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