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을 진압해 진무공신에 책록된 무신, 병자호란 때 순절, 호는 표곡
| 생몰 | 1593 ~ 1637 |
| 시대 | 조선 중기 |
| 본관 | 충주 지씨 |
지계최(池繼崔, 1593~1637)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충주, 자는 언숙(彦淑), 호는 표곡(豹谷)입니다. 충원부원군 지용기의 10세손이며, 아버지는 선원전 참봉으로 호조판서에 추증된 지세륜입니다. 이름은 어릴 때 지계설로도 적혔다고 합니다.
1623년 인조 즉위 직후 군사 600여 명을 모집해 도원수 장만의 휘하에 들어가 서로소모별장이 되었습니다. 이듬해 부원수 이괄이 강적을 보내 반란에 가담하라고 권하자 이를 거절하고 강적의 목을 베었으며,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안현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습니다. 1624년 장만·정충신·남이흥 등 26명과 함께 진무공신 3등에 책록되고 충성군에 봉해졌습니다.
1631년에는 소모장으로 다시 군사를 모아 서쪽 변경에서 싸우기를 자원했고, 희천군수·서흥부사를 지냈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서흥 검수참에서 적과 싸우다 남한산성으로 물러나는 길에 1637년 신계에서 순절했다고 전하며, 한성부판윤에 추증되었습니다. 저서로 《표곡실기》가 있습니다.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 지계최는 군사 6백여 명을 이끌고 도원수 장만의 휘하로 들어갔습니다. 1624년 반란을 일으킨 이괄이 강적을 보내 가담을 권했을 때 거절하고 그를 베었으며, 이어진 안현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전합니다. 그 공으로 정훈에 참여해 진무공신 3등이 되었습니다.
1631년 7월 그는 소모장으로서 서쪽 변경에서 목숨을 바치기를 원한다는 상소를 올렸고 비변사가 이를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습니다. 같은 해 희천군수로 나갔으나 안주와 황주 진영에서 싸우게 해 달라고 청해 본직에서 체직되었고, 이후 서흥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서흥 검수참에서 적과 맞서 싸웠고, 남한산성으로 물러나던 길인 1637년 신계에서 순절한 것으로 전합니다. 한성부판윤에 추증되었고, 1803년(순조 3)에는 정헌대부 충성부원군이 더해졌습니다. 부여군 초촌면 초평리에는 신도비가 있고 '부여 지계최 정려'가 관련 문화유산으로 소개됩니다.
저서 《표곡실기》는 그의 생애와 공훈을 모은 실기로, 지용기에서 이어진 충의군파 무관 전통을 보여 주는 자료로 소개됩니다. 지청천 장군의 가계를 서술한 글에서도 지계최는 조선 중기 이괄의 난을 진압하고 병자호란 때 장렬히 전사한 선조로 언급됩니다.
충남 부여군 초촌면 초평리에 인조가 사패와 함께 신도비를 세우게 했다고 전합니다. 묘문은 의령 남씨 남규희가 짓고 여흥 민씨 민병승이 글을 썼으며, 윤용구가 전면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부인은 여산 송씨와 전주 이씨(성종의 현손 광원정 이호의 딸)이며 여산 송씨에게서 5남 3녀, 전주 이씨에게서 2남을 두었다고 전합니다. 아들로 지수련·지수적·지수란·지수경·지수현 등이 소개됩니다.
1624년 이괄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진무공신 3등에 책록되었습니다.
《표곡실기》입니다.
병자호란 때 서흥에서 싸우다 1637년 신계에서 순절했다고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