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 박씨 시조로 모시는 신라의 충신, 왕제 구출 후 왜국에서 순국
| 생몰 | 363(위키백과) ~ 419(위키백과) |
| 시대 | 신라 눌지 마립간 때 |
| 본관 | 영해 박씨 |
박제상(朴堤上)은 신라 눌지 마립간(재위 417~458) 때 삽량주간(歃良州干)을 지내다가 왕명을 받고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왕제를 구해 낸 충신입니다. 영해 박씨는 그를 시조로 받들며, 위키백과 박제상 항목도 본관을 영해로 적고 363년에 태어나 419년에 죽은 것으로 서술합니다. 다만 출생·사망 연도는 자료마다 다를 수 있어 확정된 값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위키백과가 정리한 《삼국사기》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눌지 마립간 2년(418) 왕은 고구려에 간 동생 복호와 왜국에 간 동생 미사흔을 데려올 사람을 찾았고, 세 촌간이 모두 제상을 추천했습니다. 제상은 먼저 고구려로 가 왕 앞에서 형제의 정을 읊은 《시경》 구절을 인용해 복호를 돌려받았습니다. 《삼국유사》는 같은 일을 뱃길로 몰래 만나 데려온 이야기로 전해, 두 기록의 설명이 다릅니다.
이어 제상은 스스로 신라에서 죄를 짓고 달아나 온 것처럼 꾸미고 왜국으로 들어가 왜왕의 신임을 얻은 뒤, 미사흔과 함께 고기잡이를 하는 척하며 빈틈을 만들어 미사흔을 신라로 돌려보냈습니다. 자신은 남았다가 붙잡혀 목도(木島)로 유배되었고 오래지 않아 불태워져 죽었다고 합니다. 눌지왕은 그에게 대아찬 관등을 추증하고 유족을 후하게 위로했으며, 미사흔은 제상의 둘째 딸과 혼인했다고 전합니다.
위키백과는 이 일이 《삼국사기》 박제상열전, 《삼국유사》 내물왕 김제상 조, 《일본서기》 진구 황후기에 실려 있고 내용이 서로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삼국사기》는 다른 이름으로 모말(毛末)을 적고, 《일본서기》의 모마리질지와 연관지어 해석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왜왕이 발바닥 가죽을 벗기고 달군 쇠 위에 세워 "계림의 신하인가"를 거듭 물었으나 "계림의 신하"라고만 답했다는 대목이 있고, 이는 후대에 충절의 상징처럼 읽혀 왔습니다.
영해 박씨는 박혁거세를 원시조, 박제상을 시조로 모시고 고려 때 전법판서를 지낸 박명천을 중시조로 받듭니다. 대종회 계열 자료는 제상을 파사왕의 6세손으로 소개합니다. 다만 박제상은 강릉 박씨 등 다른 본관의 문헌에서도 윗대 인물로 언급되므로, 어느 본관이 직계인지는 족보와 문중에 따라 설명이 다르다는 점을 함께 알아 두시면 좋습니다.
영해 박씨 문화유적으로 소개되는 곳에는 충렬묘, 신모사, 쌍정려, 치산서원이 있고, 벌지지·장사·치술령 같은 기념지도 함께 꼽힙니다. 이 사이트의 사진은 그 유적 가운데 하나인 박제상 유적을 찍은 것으로, 인물 사진이 아닙니다.
순국한 곳은 왜국의 목도라고 전하며, 묘소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를 기리는 사당과 유적은 여러 곳에 전합니다.
영해 박씨 족보는 아들로 박문량(백결 선생)을 적는다고 위키백과가 전합니다.
영해 박씨가 시조로 모십니다. 위키백과도 본관을 영해로 적습니다.
눌지왕의 동생 복호와 미사흔을 고구려와 왜국에서 구해 낸 뒤 왜국에서 순국했다고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