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 홍문관 부제학
| 생몰 | 1532 ~ 1585 |
| 시대 | 조선 전기 (명종~선조) |
| 본관 | 영월 신씨 |
신응시(辛應時, 1532~1585)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월, 자는 군망(君望), 호는 백록(白麓), 시호는 문장(文莊)입니다. 신석(辛奭)의 증손이고, 할아버지는 신윤형(辛尹衡), 아버지는 부사 신보상(辛輔商)이며, 어머니는 민거(閔琚)의 딸입니다. 세계일보의 성씨 연재는 그를 고려 문하시중 신중석의 9세손으로 소개하며, 형으로 신응기(辛應基)가 있었습니다.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배웠습니다.
1552년(명종 7) 진사가 되었는데, 이 해 식년시 동방에는 의병장 고경명 등이 있었습니다. 1559년(명종 14)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세자시강원 설서와 사간원 정언을 지냈고, 유능한 젊은 관료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하게 하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혔습니다. 1566년 문과 중시에 다시 급제하고, 예조·병조의 좌랑과 홍문관 교리 등을 거쳐 선조 즉위 초에 경연관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상중에는 『주자대전』에서 예에 관한 부분을 가려 뽑아 『주문문례(朱門問禮)』를 펴냈습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연안부사·예조참의·병조참지를 거쳐 대사간과 홍문관 부제학에 이르렀습니다. 1580년(선조 13)부터 2년 동안은 광주목사로 있었는데, 광주의 정자 봉생정을 노래한 시 「광산(光山)」을 남겼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가 경연에서 고금의 사례를 막힘없이 인용했다고 전합니다. 지방관으로 있을 때는 풍속을 바로잡고 교육을 일으켰으며, 사사로운 일에 청렴해 집안에 가재도구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성혼·이이와 교분이 특히 두터웠습니다. 아들 신경진도 이이의 문인이 되어 대사헌에 올랐고 청백리에 뽑혔습니다.
저서로 아들과 함께 엮인 시문집 『백록유고(白麓遺稿)』가 전하며, 황해도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습니다.
아들 신경진(辛慶晉)이 대사헌을 지내고 청백리에 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