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 대사헌·청백리
동명이인 안내 — 같은 이름의 다른 인물:
신경진(申景禛) — 인조반정을 이끌고 영의정에 오른 무장·공신
| 생몰 | 1554 ~ 1619 |
| 시대 |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
| 본관 | 영월 신씨 |
신경진(辛慶晉, 1554~1619)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월, 자는 용석(用錫), 호는 아호(丫湖)입니다. 디지털강릉문화대전에는 호가 명호(冥湖)로 적혀 있습니다. 신윤형(辛尹衡)의 증손이고 할아버지는 신보상, 아버지는 홍문관 부제학 신응시(辛應時)이며, 어머니는 정기(丁琦)의 딸입니다. 율곡 이이의 문인입니다. 인조반정 공신인 평산 신씨 신경진(申景禛)과는 다른 인물입니다.
1573년(선조 6) 진사가 되고 1584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습니다. 승문원·예문관 등에서 일하다가 1591년 병조좌랑으로 진주사 한응인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평으로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했고, 체찰사 유성룡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습니다.
1594년(선조 27) 무렵 강릉부사로 부임해 강릉향교의 동무·서무와 명륜당을 중수하고 그 앞에 연못을 만들고 하마비를 세웠습니다. 선정을 베푼 공으로 통정대부로 승진했다고 합니다. 이때 당종 신경철(辛慶鐵)과 신경원(辛慶遠)이 그를 따라와 강릉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왜란 뒤에는 사간·이조참의를 거쳐 성주목사와 충주목사를 지냈습니다. 성주목사로 있던 1602년에는 말근석방이라는 지명을 산남방으로 바꾸었습니다.
1609년(광해군 1)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예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1612년 사돈 황혁이 이이첨의 음모에 걸려 화를 입자 연루되어 파직되었고, 다시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했습니다. 문무의 재주를 함께 갖추어 이름이 높았고 청백리에 뽑혔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엮인 시문집 『백록유고』가 전하며, 도암 이재가 신도비문을 지었습니다.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천서리 담월마을의 담월사는 후손 신민집이 1909년 단을 세워 신경진의 제사를 지내다 1926년에 지은 사당입니다. 지금은 율곡 이이와 신영경을 함께 모십니다. 디지털익산문화대전의 담월사 항목은 그가 호성공신에 올랐다고 적고 있으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이 내용이 없습니다.
후손 신민집이 익산 춘포면 천서리 담월마을에 담월사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