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문신·문장가, 대제학·좌찬성 (호 기재, 시호 문간)
| 생몰 | 1484 ~ 1555 |
| 시대 | 조선 전기 |
| 본관 | 고령 신씨 |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문장가로, 자는 한지(漢之)·시회(時晦), 호는 낙봉(駱峰)·기재(企齋)·석선재(石仙齋)·청성동주(靑城洞主)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입니다. 영의정 신숙주의 손자로, 아버지는 내자시정 신형(申泂), 어머니는 정보(鄭溥)의 딸입니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호당에서 사가독서를 하였습니다. 승문원 박사, 홍문관 부수찬·교리, 정언, 공조정랑, 홍문관 전한 등을 거치며 경연에서 조광조 등과 함께 시무를 논하였고, 1518년 특명으로 대사성에 올랐습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 일파로 몰려 삼척부사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파직되었고, 여주로 물러나 18년 동안 칩거하였습니다.
1538년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이들이 다시 등용되면서 대사성으로 복직하였고, 대사간·경기도관찰사·한성부우윤·병조참판을 거쳐 1540년 대사헌이 되어 관리의 기강을 엄히 했습니다. 이어 호조참판,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고, 인종 때 대제학에 올랐습니다. 명종 즉위 뒤 을사사화 때 소윤 쪽에 가담하여 위사공신 3등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영성부원군으로 추봉되었습니다. 좌참찬·예조판서·판돈녕부사를 거쳐 좌찬성에 올랐고, 1553년 기로소에 들어가 궤장을 받았습니다. 1554년 사직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장에 능해 시문을 많이 남겼고, 대사성 시절에는 학도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이조판서로 있을 때 인사를 공정히 하고 초야의 선비를 많이 등용했다는 평을 받습니다. 학문은 맹자와 한유를, 시는 두보를 본받았다고 합니다. 저서로 『기재집』이 있으며, 1553년 한문 단편소설집 『기재기이(企齋記異)』를 지었습니다.
형 신광윤의 후손이 청주 낭성·가덕 일대에 세거하며 '산동 신씨'로 불렸고, 신광윤의 증손 신식이 이 계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