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사학자 (단재)

| 생몰 | 1880 ~ 1936 |
| 시대 | 근현대 |
| 본관 | 고령 신씨 |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대한제국·일제강점기의 언론인·민족주의 사학자·독립운동가로,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 필명은 무애생·열혈생·한놈 등입니다. 보한재 신숙주의 18대손으로, 1880년 12월 8일(음력 11월 7일) 충청도 공주목 정생면 도라산리(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신광식과 밀양 박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여덟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신성우를 따라 집안의 족향인 청주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 한학을 익혔습니다.
1898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갔고,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곧 물러나 『황성신문』 논설위원이 되었습니다. 1907년 무렵부터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약하며 「독사신론」(1908)과 위인전 등을 써서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상하이·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했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나 이승만의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에 반발하여 갈라섰습니다.
1923년 김원봉의 요청으로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을 써서 민중에 의한 직접 혁명을 주창했고, 같은 해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시정부를 떠나 외교론을 비판했습니다. 이후 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하였고, 1928년 대만에서 체포되어 1930년 10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뤼순 감옥에서 복역하다 1936년 2월 뇌일혈로 쓰러져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순국했습니다. 『조선상고사』·『조선사연구초』 등의 저술은 근대 민족주의 역사학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첫 부인 풍양 조씨와 헤어진 뒤 1920년 간호사 출신 독립운동가 박자혜와 재혼하여 아들 신수범 등을 두었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묘소는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에 있습니다. 같은 청주 산동 신씨 문중의 신규식·신백우와 함께 '산동 3재'로 불린다고 합니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조부 대부터 살던 고향 선영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1920년 재혼한 박자혜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고, 그 중 차남 신수범이 장성하여 1991년까지 생존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