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문신, 도승지·함길도관찰사 (이시애의 난 때 전사)
| 생몰 | 1467 |
| 시대 | 조선 전기 |
| 본관 | 고령 신씨 |
신면(申㴐, ?~1467)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영의정 신숙주와 무송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고령이며, 할아버지는 신장, 외증조부는 세종 때의 문신 윤회(尹淮)입니다. 문헌에 따라 이름을 申沔으로도 적습니다. 위키백과는 1438년생으로 적지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생년을 미상으로 둡니다.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나아가 1455년(세조 1) 좌익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도염서령·종부시소윤 등을 거쳤습니다. 함길도 도체찰사로 나간 아버지를 위문하는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1461년(세조 7) 사헌부 장령이 되었고, 1463년 승정원 우부승지·지공조사, 이어 우승지를 거쳐 1466년 도승지에 올라 세조를 가까이에서 보필했습니다. 같은 해 아버지 신숙주, 정창손 등과 함께 독권관이 되어 문과 초시·중시를 관장했습니다.
1467년 함길도관찰사가 되었는데, 그해 5월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켰습니다. 조정은 그를 동지중추부사로 삼고 어세공을 새 관찰사로 보내 교체하려 하였으나, 어세공이 도착하기 전에 반군이 관찰사 청사를 포위했습니다. 당시 아버지 신숙주까지 이시애와 내통했다는 의심을 받던 상황이었습니다. 신면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활과 화살을 들고 성에 올라 활을 쏘아 네 사람을 쓰러뜨렸고, 화살이 다하자 활을 꺾어 버리고 싸우다가 전사했습니다.
사후 좌찬성 겸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뒤에 아들 신용개가 좌의정에 오르면서 영의정으로 다시 추증되었습니다. 1471년(성종 2) 적개공신 3등에 추록되었다가 대간의 반대로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부인은 정호(丁湖)의 딸 정씨입니다. 형 신주는 한명회의 사위였고, 아우로 신찬·신정·신준·신부·신형·신필이 있었으며, 이복 누이는 세조의 후궁 숙원 신씨가 되었습니다.
처음 양주 고산리(지금의 의정부시 고산동)에 묘가 마련되었고, 2004년 부인 정씨의 묘와 함께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구문천리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아들 신용개가 좌의정에 올랐습니다.